실학과 지도 - 고지도를 통해 본 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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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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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동국지도는 현대 지도의 축척으로 환산했을 때 대략 1:50만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축척 지도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지도에 이전 시기 지도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다양한 정보를 담을 수 있었고, 이후 대축척 지도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동국지도는 우리 나라 국토의 원형을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동국지도에서 확립된 국토의 모습은 약간의 수정은 가해지지만 일제에 의한 근대적 측량지도가 나오기 이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지도에 이전 시기 지도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다양한 정보를 담을 수 있었고, 이후 대축척 지도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1757년 조정에 알려지게 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이후 관청에서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이는 정상기의 지도가 행정·군사적 용도로는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는 1770년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지도(輿地圖)〉 제작사업이다. 그는 영조의 명을 받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와 짝할 수 있는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 때 기본도로 사용된 것이 정상기의 동국지도였다. 이를 토대로 도별도(道別圖), 군현지도(郡縣地圖) 등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지도는 이후에도 관에서 계속 모사되면서 널리 이용되었다.
민간에서도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도제작에 이용되었다. 특히 해주 정씨 가문의 정철조(鄭喆祚 1730~1781), 정후조(鄭厚祚 1758~1793) 형제는 정상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편집하여 더 뛰어난 해주본(海州本)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그의 후손과 다른 지도제작자들에 의해 수정, 보완되면서 조선후기 지도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4년 제작된 김정호의 〈청구도(靑邱圖)〉 도 바로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되었던 전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그의 〈청구도〉를 바탕으로 보완·발전시킨 것인데 이 역시 그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면 정상기의 동국지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한말 일본을 통해 근대식 지도제작의 기법이 서서히 도입될 때에도 정상기의 지도는 여전히 정부에 의해 제작되는 각종 전도의 기본도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동국지도가 조선후기 지도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지도제작기술이 도입되기 이전에 제작된 동국지도와 같은 전통시대의 지도들은 현대의 지도와는 제작기술이나 표현방식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단순히 정확도의 관점에서 전통시대의 지도를 평가한다면 여전히 미숙한 지도에 불과할 것이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도 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하나의 지도가 탄생하기까지에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의 독창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축적된 많은 경험과 당시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던 지식과 관념들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만큼 지도는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과는 다른 강한 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동국지도는 비록 정상기 일 개인의 역작이라 할 지라도 그 속에는 조선시대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지도제작의 문화적 역량이 담겨져 있으며 우리의 국토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표현하려 했던 선조들의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발췌 | 수원의 옛지도, 수원시장 심재덕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