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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2층
다산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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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수 洌水 (한강)
조선시대에 한강을 부르던 다른 이름이다. ‘열수’는 정약용이 고향 마재로 돌아와 환갑이 되기 전까지 사용한 별호이기도 하다. 한강에 사는 노인이라는 뜻의 열수옹 洌水翁, 열수산인 洌水山人, 열로 洌老, 열초 洌樵 등으로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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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천 苕川
정약용 생가 앞에 흐르던 갈대숲 우거진 실개천이다. ‘소내’라고도 하며,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정약용이 많이 사용한 별호는 아니지만 50대 후반에 ‘초계 苕溪’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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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酉山
정약용의 묘가 있는 산이다. 유배지 강진에서도 그의 마음은 항상 고향 유산에 있었다. “유산 酉山은 귀향살이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곳을 말한다. 자기 가정을 떠나 있어 마음을 정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 저 유산 아래는 내가 사는 집이 있고 - 끝없이 넓은 열수에는 물고기가 가득하여 - 정원도 있고 남새밭도 있고 거문고도 있고 책도 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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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與猶堂
1800년 (정조 24)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산은 고향 마재로 돌아와 형제들과 경전을 공부하며, 그곳에 ‘여유당’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여유 與猶’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라는 뜻으로 <노자>에 보인다. 세상일과 자신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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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현 丁若鉉 묘
정약현 (1751 ~ 1821)은 정약용의 큰 형이다. 두 살 때 어머니인 의령 남씨가 죽자 수년간 외가에서 자랐다. 아버지 정재원 丁載遠이 윤두서의 손녀 해남 윤씨와 재혼하여 낳은 정약용과는 이복형제였다. 그의 부인 경주 이씨는 다산의 벗이자 천주교 신자였던 이벽 李檗의 누이였다. 45세 때인 1795년 (정조 19)에 진사시 進士試에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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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산 鐵馬山
쇠말산이라고도 부르며, 마재마을의 유래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철마산의 명칭은 산 등마루에서 나왔다는 쥐 만한 크기의 철마 鐵馬에서 유래한다. 정약용은 서울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철마산의 이름을 딴 철마산초 鐵馬山樵, 철마초부 鐵馬樵夫 등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도 철마산방 鐵馬樵房이라는 공부방을 만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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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丁若鏞 묘
정약용은 1762년 음력 6월 16일에 사시 (10 ~ 11시)에 태어나 75세이던 1836년 음력 2월 22일 진시 (8 ~ 9시)에 세상을 떠났다. 그해 4월 1일 유언에 따라 집 뒷산에 장사지냈다. 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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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사 文度詞
정약용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그의 시호를 따서 세운 사당이다. 다산은 1910년 7월 18일에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으로 추증 追增되었고, ‘문도공 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 ‘문도’는 학문에 부지런하고 듣기를 좋아함을 ‘문 文’이라 하고, 마음을 능히 의리로써 제어함을 ‘도 度’라고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