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건국 이후 이렇다할 큰 전란을 겪지 않고 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연이어 겪으면서 농토는 황폐화되어 국가의 재정이 크게 줄어들었고 백성들은 생활에 큰 어려움 겪게 되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왕의 귄위가 크게 떨어져 신료들의 권한이 더 강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라의 살림을 맡은 양반사대부들은 붕당을 결성하여 갖가지 명분을 걸고 쉼 없는 정쟁을 거듭하면서도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은 돌보지 않아 많은 원성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학’이다.
실학 사상의 등장은 구시대의 사회 체제를 극복하고, 부국강병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지식인들 사이의 일련의 사상 체계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실학자들은 무릇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국기(國技)인‘무예24기(技)’는 탄생하게 된다.
무예24기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라 불리는 정조 14(1790)년 4월 장용영(壯勇營)에서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린 24가지 기예를 말한다. 여기에 실린 24가지 기예는 조선의 쓰라린 전쟁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왕조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진법과 활, 대포만이 아니라 소홀히 다루었던 창검무예가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승리하기 위해 조선의 군대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군사들의 창검무예를 열심히 익혔다. 1598년, 선조의 명을 받은 훈련도감의 낭청[실무자] 한교가 중심이 되어 중국의 기예인 장창과 쌍수도 등 6기를 조선의 군사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풀이한「무예제보」를 편찬하였다. 이어서 1604년에는 맨손권법을 풀이한「권보」를, 그리고 1610년 광해군이 집권한 시기에는「무예제보번역속집」을 편찬하여 군영에 보급하였다. 이후 1759년 북벌을 준비했던 할아버지 효종을 빼 닮았던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주도로 훈련도감의 장교 임수웅이 18가지 기예를 정리한「무예신보」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역사 배경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인 정조는 즉위하던 1776년에 아버지가 완성한 18가지 기예와 더불어 마상무예 4기를 군사들에게 적극적으로 훈련토록 지시하였다. 또한 이들 기예들을 1785년부터는 무사를 선발하는 시험과목으로 규정하였으며, 1790년에 기마군(騎馬軍)의 훈련강화를 위해 마상재와 격구를 추가하여 24가지의 기예를 그가 창설을 주도한 최정예의 군부대인 장용영에서 편찬하게 하고 책이름을「무예도보통지」라 지어주었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무예의 역사와 고증은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 이덕무 그리고 무예실기는 장용영 초관 백동수가 책임을 맡았다. 이처럼 동양 최고의 무예서로 꼽히는 「무예도보통지」는 국왕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문무(文武) 인재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책은 장용영을 비롯한 훈련도감, 어영청 등 중앙군영은 물론이고 지방의 군영까지 보급되어 군사들의 훈련교범으로 사용하였다.
무예24기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에는 실학(實學)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정신이 ‘금(今)’과 ‘용(用)’의 정신이다. 예를 들면 24가지의 기예를 중국[화식(華式)]과 일본[왜식(倭式)]의 기예와 더블어 조선의 방식을 그림으로 표현 것의 설명을 조식(朝式)이 아닌 ‘금식(今式)’이라 표현하였다. 이는 바로 동양삼국 최고의 무예를 적극 받아들여 오늘날 우리 군사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편집자인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정조 임금께 올린 글에 “그리하여 조정은 실용 있는 정책을 강론하고, 백성은 실용 있는 직업을 지키고, 학자들은 실용 있는 책을 펴내고, 무사들은 실용 있는 기예를 익히고, 상인들은 실용 있는 상품을 유통시키고, 장인들은 실용 있는 기구를 만든다면, 어찌 나라를 지키는 일을 염려하며 어찌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걱정이 있겠습니까?”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이는 조선의 군사들이 익히는 무예 또한 지극히 실사구시의 발상으로 접근하겠다는 실학정신의 표현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24기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바쳤던 조선의 무사들과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고심했던 실학자들의 공동작품이다. 다시 말해 무예24기는 오랜 역사경험과 전투현장에서 걸러진 실학정신의 무예적 표현물이자 자주국방을 상징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라 할 것이다.
수원 화성(華城)은 앞서 설명한 「무예도보통지」 무예24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정조는 1784년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이를 경축하는 과거시험을 열어 많은 무사를 뽑고, 이듬해에는 훈련도감과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 가운데 무예실력이 빼어난 자를 뽑아 국왕경호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였다. 이후 장용위는 1788년에 ‘장용영(壯勇營)’이라는 독립군영으로 발전하였고, 1793년에는 도성의 내영과 수원에 외영을 두어 기존의 핵심 군영인 훈련도감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정조가 주도하여 창설한 장용영은 주 훈련과목으로 무예24기를 채택하여 전투력 극대화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처럼 당시 최고의 무사들이 모인 곳이 장용영이었으며, 장용영 외영군이 주둔했던 수원 화성은 무예24기가 가장 활발하게 수련되고 펼쳐졌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장용영은 정조가 서거한 후 1802년 노론벽파들에 의해 17년만에, 짧지만 영원한 족적을 남겨 놓으며 폐지되었다. 결론적으로 수원 화성은 정조의 효정신과 실학사상 및 자주국방의 상징인 「무예도보통지」무예24기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공간으로,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전통문화 산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