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과 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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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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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신의주와 중국의 단둥을 연결하는 철교이다. 왼편의 것은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끊어진 것이고, 오른 편의 것은 그 후에 새로놓은 것이다. 새로놓은 철교에는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과거보존 차원에서 남겨진 왼편의 다리 위에는 한국 전쟁당시 중공군의 활약상과 미군의 모습을 담은 장면들이 판넬로 제작 전시되어 일종의 ‘간이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변문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조선사신 일행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중국의 관문이다 명나라시절, 구련성(九蓮城)이라고도 불렸던 이곳에서 조선사신들은 인원과 소지했던 물자들을 점검하고 본격적인 중국 내지로의 사행을 준비했다. 구련성은 명 중기에 쌓았던 것이지만 청나라 이후로는 방치되어 퇴락해 버렸다. 지금은 단둥 외곽의 변두리가 된 이곳에서 조선족들이 경영하는 작은 가게들과 한글 간판들을 볼 수 있다.
변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만주 벌판을 통과할 때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산이다. 넓게 펼쳐진 수수밭 평원과 대조적으로 837미터의 우뚝솟은 봉우리들이 이 사람들을 압도한다. 만주에서는 보기드문 산악인지라 등산객 차림의 사람들도 제법눈에 들어온다. 산입구의 석문에는 진의천인, 적상청운 등의 글짜가 새겨져있고 산속에는 불교와 도교의 사찰들이 들어서있다.
요양은 명나라 시절 만주의 중심이자 산해관 바깥의 ‘오랑캐 ’들을 아우르는 거점이었다 . 영락제가 이곳에 요동동사를 설치한것도 이곳이 만주를 장악하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요양벌판에 우뚝선 백탑은 거란족 국가인 요나라 시절에 세운전탑이다 . 13층, 71미터까지 장대하게 쌓아올린 흰 벽돌들로부터 반사되는 빛은 북경을 향해 일망부제의 평원을 지나는 조선사신들에게 참으로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탑은 이름만 남았을뿐 공업도시 요양의 매연에 찌들어 오히려 ‘ 흑탑 ’ 처럼 보일 뿐이다.
고궁은 1626년에 건설된 후금의 황궁이다. 건주여진의 일개 부족 집단에서 출발하여 만주 전체를 아우르고, 장차명과 맞서겠다는 누르하치 집단의 의지가 담긴 정치적 중심지이다.
대정전 앞에는 만주 팔기의 각 기의 집소가 배치되어 있다 . 1637년 병자호란에서 항복했던 이후 인질로 끌려왔던 조선의 소현세자일행과 청애 다한 복속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던 삼학사의 넋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청 태종 황태극이 묻힌 소릉의 봉분 모습이다. 앞 부분에는 능의 모습을 더 장대하게 보이기 위해 석패방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겹겹으로 배치 되어 있다. 중앙에 심은 나무는 땅과 하늘의 기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전한다.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에 침입하고, 인조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으며, 수많은 조선인 인 포로를 끌고 갔던 태종이 봉분을 돌아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북녕은 명나라 시절 북진이자 광녕이라고 불렀던 만주 지역의 국방상 요충지이다.
이곳에 명은 요동총병관 등을 두어 여진족등을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근처에 있는 의무려산 자락에 세워진 북진묘는 중국 황제가 동북 지역을 다스리는 지신 등을 제시하는 일종의 묘사이다.
북진묘는 내부에는 명에서 청에 이르는 시기에 세워진 많은 비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북녕 시가지에는 16세기 후반 이 지역에 머물면서 만주 지역의 ‘군벌’ 로 우뚝섰던 조선 출신 이성량의 패방이 남아 있다.
북녕시 동북 변두리에 남아 있는 쌍탑이다. 요나라 시절 만들어졌거니와 동탑의 높이는 43.8미터, 서탑의 높이는 42.6미터이고 두 탑사이의 거리는 43미터이다. 벽돌로 쌓은 8각 13층의 두 잡의 갇은 2층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좌불이 모셔져 있고 그 주병에는 협시 보살들이 새겨져 있다.
의무려산 자락에서 아련하게 보이는 쌍탑의 모 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북녕시 근처에 있는 명산이다.
산해관 바깥에서 동북지역을 아우르는 진산으로 언뜻보면 바위가 많은 모습이 관악산과 대단히 닮았다. 북경을 향해 평원과 평원을 지루하게 걸으며 지쳐있던 조선사신 일해에게는 고국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홍대용의 명저 의산문답은 바로 이 곳을 무대로 서술되었다. 산속에는 옥천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과 도관들이 세워져있고, 바위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남긴 시구들이 새겨져 있다.
홍성은 명나라시절 산해관 바깥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 가운데 한였다 , 1626년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는 기마대를 이끌고 이곳을 공격하다가 명나라 장수 원숭환의 홍이포 세례를 받고, 부상을 입고 결국 절명했다. 지금도 당시 성의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성안에 남아 있는 조대수 패방의 주위에는 관광객을 비롯한 인파가 끊이지 않아 ‘ 역사 도시 ’ 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산해관은 북경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 감숙성에서 시작된 만리장성잉 동쪽 끝에서 발해와 만나는 곳이다. ‘천하제일관 ’이라는 오만한 문구가 상징하듯이 이 문을 들어서야 비로소 ‘중화의 세계 ’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었다. 글자 하나가 1.6미터나 되는 장대한 이 관문을 지키던 오삼계는 1644년 청나라 군대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청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북경을 접수할 수 있었다.
북경 쪽에서 이어져온 연산산맥의 동쪽 끝트머리인 각산산성의 길이는 1587미터에 이른다. 명나라 초기에 건설되기 시작한이 각산관은 해발 444미터의 험준한 절벽 위에 설치되었다. 산성의 여기저기에는 척계광이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적대의 형식을 계승한 많은 방어 시술믈들이 산재해 있다.
진시황시절 만리장성 축성공사에 동원되었던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죽은 정절녀 맹강녀를 모신 사당이다 . 축성 공사중에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맹강년는 호곡하면서 진시황을 질타했다. 진시황은 맹강녀의 미색과 대담성에 반해 그녀를 회유하여 유혹하려 했으나 맹강녀는 끝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고,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봉황산에 사당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존하는 북경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성당이다 .천주교가 중국에 전파되는 과정에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 테오리치의 역할이 컸다. 그는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문화와 학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유럽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중국에 전수하려고 시도했던 문화인이었다. 남당 역시 1601년(만력29)년에 건립한 것이다. 남당은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경을 방문했던 조선 사신들도 들렸던 ‘명소’ 이자 이문화 섭취를 위한 전당이었다.
열하의 표지석과 보타종승묘의 원경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260여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열하의 현재 이름은 승덕이다.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열하에는 옹정, 건륭 연간에 걸쳐 청나라왕실의 이궁들이 건설되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은 여름철 열하의 피서산장에 머물녀서 피서뿐 아니라 여전히 청에게 위협적 존재였던 몽골 세력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피서산장 부근의 구릉에는 포탈라궁을 본따 건설한 보타종승묘를 비롯하여 보락사, 수미복수묘 등의 라마사원이 건설되었다. 청은 내몽고의 초원지대인 아우르는 사원들을 건설함으로써 중화세계의 안과 밖을 모두 아우르는 지배자임을 과시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