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_콩 한알로 이십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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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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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한 알, 이십 걸음
성호 이익은 부친을 귀양지에서 잃고 가세가 더욱 기울었다. 몇 년 후에는 어머니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생활은 더욱 궁색해졌다. 날이 갈수록 이익은 집안을 다스릴 때 검소함에 대한 자세와 법도를 중시했다. 봄이면 사내종 한 사람을 택해 논밭을 맡겼고 가을이면 그렇게 수확한 벼를 집안에 들여 적지 않은 식구를 봉양했다. 봄이면 뽕나무와 목화를 심어 의복을 해결했고 과일나무를 심어 가을에 제수용품을 해결했다. 성호 이익은 대부분 들판이나 밭을 서성였고 매사 연구하고 관찰했다. 봄가을에 벼와 보리가 없으면 깊이 근심했다. 가을이 되자 산비탈에 심은 콩밭을 오래 살피다 힘겹게 허리를 들었다.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간밤에 서리가 내렸지만 콩이 무사해서 다행이다.’
성호 이익은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리며 비탈밭을 내려갔다. 행랑아범이 뒤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나리. 살펴 내려가세요. 쇤네는 좀 더 둘러보고 가겠습니다요.”
‘간밤에 서리가 내렸지만 콩이 무사해서 다행이다.’
성호 이익은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리며 비탈밭을 내려갔다. 행랑아범이 뒤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나리. 살펴 내려가세요. 쇤네는 좀 더 둘러보고 가겠습니다요.”
해가 한 뼘 더 서쪽으로 기울자 가을 억새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시월 중순이라 바람이 차가웠다. 홍두는 올해 열네 살이었다.
“응애- 응애-”
며칠 전 늦둥이 남동생이 태어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응애- 응애-”
“아가, 울지 마라. 자꾸 울면 주린 배만 더 꺼진다…….”
엄마는 먹은 게 없어 젖이 나오지 않았다. 홍두는 텅 빈 곡식항아리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아랫동네로 곡식을 꾸러 간 아버지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 저번 곡식도 아직 못 갚았으니 누가 양식을 꿔주겠는가? 오늘도 또 굶게 생겼으니 이 일을 어쩐다……. 부인 조금만 견뎌보시오. 냇물 건너 마을에라도 가서 사정해 보리다.”
홍두 아버지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홍두는 몰락한 양반의 여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락한 양반을 잔반이라 불렀다. 홍두 엄마는 빈 젖을 아기 입에 물리고 슬픔을 삼켰다. 배가 너무 고팠던 홍두는 거리로 나왔다. 며칠 동안 먹은 게 없어 현기증이 일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개울로 갔다. 홍두는 어제처럼 물에 얼굴을 담그고 벌컥벌컥 배를 채웠다. 물을 마신 홍두가 갈라 터진 손등으로 입을 쓱 닦았다. 건너편 산비탈에 밭이 보였다. 여름내 푸르렀던 콩잎이 누렇게 말라 뚝뚝 떨어졌다. 콩잎이 떨어지는 것은 콩이 잘 여물었다는 신호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콩꼬투리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다. 홍두의 귓가에 허기진 동생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홍두는 뭔가에 홀린 듯 산비탈을 기어 올라갔다.
마른 풀과 삭정이에 종아리가 찔려 쓰라렸다. 언덕 위로 올라가 가쁜 숨을 쉬며 주변을 보았다.
“응애- 응애-”
며칠 전 늦둥이 남동생이 태어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응애- 응애-”
“아가, 울지 마라. 자꾸 울면 주린 배만 더 꺼진다…….”
엄마는 먹은 게 없어 젖이 나오지 않았다. 홍두는 텅 빈 곡식항아리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아랫동네로 곡식을 꾸러 간 아버지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 저번 곡식도 아직 못 갚았으니 누가 양식을 꿔주겠는가? 오늘도 또 굶게 생겼으니 이 일을 어쩐다……. 부인 조금만 견뎌보시오. 냇물 건너 마을에라도 가서 사정해 보리다.”
홍두 아버지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홍두는 몰락한 양반의 여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몰락한 양반을 잔반이라 불렀다. 홍두 엄마는 빈 젖을 아기 입에 물리고 슬픔을 삼켰다. 배가 너무 고팠던 홍두는 거리로 나왔다. 며칠 동안 먹은 게 없어 현기증이 일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개울로 갔다. 홍두는 어제처럼 물에 얼굴을 담그고 벌컥벌컥 배를 채웠다. 물을 마신 홍두가 갈라 터진 손등으로 입을 쓱 닦았다. 건너편 산비탈에 밭이 보였다. 여름내 푸르렀던 콩잎이 누렇게 말라 뚝뚝 떨어졌다. 콩잎이 떨어지는 것은 콩이 잘 여물었다는 신호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콩꼬투리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다. 홍두의 귓가에 허기진 동생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홍두는 뭔가에 홀린 듯 산비탈을 기어 올라갔다.
마른 풀과 삭정이에 종아리가 찔려 쓰라렸다. 언덕 위로 올라가 가쁜 숨을 쉬며 주변을 보았다.
‘우와! 콩이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희미했던 홍두의 눈이 순간 동그래졌다. 드넓은 밭에 주렁주렁 달린 콩들이 수확을 기다렸다. 행여 누가 볼까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홍두가 콩 줄기를 훑으려 단단히 잡아 쥐었다. 힘껏 뽑으려다 순간 손을 멈췄다. 아이는 생각했다.
‘괜찮을까……? 손대면 안 돼, 이건 남의 거잖아?’
홍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생각했다.
‘괜찮을 거야. 나는 안 먹을 거야. 참을 수 있어. 어린 동생과 아프신 엄마 몫만, 아주 조금만……, 두 줌만 가져갈 거니까. 괜찮을 거야. 하늘도 눈 감아 주실 거야.’
아이는 멈췄던 손으로 힘껏 콩을 잡아당겼다. 아이가 치마폭에다 콩을 두어줌 훑어 담았다. 콩을 보자 홍두의 머리에 엄마와 어린 동생의 활짝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웬 놈이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고함을 쳤다.
“헉! 어떡하지?”
홍두는 뒤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리가 제 맘대로 후들거렸다.
“웬 놈이 남의 밭에서 콩을 훔치는 게여? 당장 나오지 못해!”
뒤에서 들리는 고함소리가 지게작대기로 콩밭 둔덕을 냅다 후려쳤다. 겁에 질린 홍두가 콩을 쥔 채 밭고랑에서 간신히 일어났다. 고함소리의 주인공이 홍두의 뒷덜미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너! 잘 걸렸다. 그동안 계속 콩을 훔쳐간 도둑이 너여? 대체 누가 콩을 훔쳐가나 했는데 오늘 딱 걸렸네.”
눈앞이 캄캄해진 홍두가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아니에요. 저는 오늘 처음 훔쳤어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듣기 싫어! 냉큼 따라와!”
그가 홍두의 덜미를 잡고 마을로 내려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홍두는 두려워 심장이 요동쳤다. 행랑아범이 잔뜩 겁에 질린 홍두를 마당에 꿇렸다. 그러고는 굳게 닫힌 장지문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나리. 나리.”
“무슨 일이냐?”
방문은 열리지 않고 음성만 들려왔다. 행랑아범이 홍두를 한번 힐끗 보더니 아뢰었다.
“콩 도둑놈을 잡았습니다요. 이놈을 어찌할깝쇼?”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한 선비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성호 이익이었다.
“콩 도둑을 잡았다고?”
성호 이익이 홍두의 차림새를 찬찬히 살폈다.
“이 아이냐?”
홍두의 차림새는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가을이 왔지만 홍두의 옷은 아직도 얇은 여름옷이었다. 더구나 심하게 낡아 이곳저곳 꿰맨 상태였다. 그러나 아이의 눈은 선했고 총기가 있었다. 전혀 근본이 없는 아이 같지 않았다. 성호 이익이 홍두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 네가 콩을 훔쳤느냐?”
홍두는 떨리는 목소리로 용기 냈다.
“나, 나리, 저는 개울 건너 사는 홍두라 하옵니다. 제가 나리의 콩을 훔친 것은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정말 오늘 처음 훔쳤습니다. 예전에는 절대 훔친 적이 없습니다. 나리,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성호 이익이 궁금한 듯 홍두에게 물었다.
“그래, 너는 왜 콩을 훔쳤느냐?”
홍두는 집안사정을 상세히 아뢰었다. 사정을 들은 성호 이익이 행랑아범에게 일렀다.
“저 아이를 배불리 먹여 보내줘라. 어린 것이, 제 배를 채우려한 것도 아니고 갓 태어난 동생과 어머니를 주려고 그랬다니 죄를 묻지 않겠다.”
행랑어멈이 홍두를 데려가 배불리 먹였다. 성호 이익은 행랑아범을 시켜 뭔가를 내오게 했다. 잠시 후, 행랑어멈이 뭔가를 머리에 이고, 남종은 지게에 지고 나왔다. 성호 이익이 홍두를 향해 말했다.
“이것은 오늘 만든 콩죽과 두부, 그리고 비지라는 것이다. 가져가서 우선 급한 대로 양식을 하여라. 그리고 이것은 콩에서 짠 두유다. 집에 가자마자 네 동생과 어머니에게 천천히 마시게 해라. 그리고 이것은 이번에 수확한 햇콩 한말이다. 내가 이것을 네 집으로 보내줄 것이다. 앞으로는 그 착한 얼굴로 도둑질 하지 말고, 내게 와서 필요한 만큼씩 콩을 가져가거라. 알았느냐?”
깜짝 놀란 홍두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나리, 잘못을 저지른 저에게 귀한 것을 이리도 많이 주시다니요? 정말 감사하옵니다.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지게에 햇콩 한말을 실은 머슴이 앞장섰다. 그 뒤를 행랑어멈이 머리에 양푼을 이고 뒤따랐다. 홍두가 대문을 향하는데 성호 이익이 아이를 다시 불러 세웠다.
희미했던 홍두의 눈이 순간 동그래졌다. 드넓은 밭에 주렁주렁 달린 콩들이 수확을 기다렸다. 행여 누가 볼까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홍두가 콩 줄기를 훑으려 단단히 잡아 쥐었다. 힘껏 뽑으려다 순간 손을 멈췄다. 아이는 생각했다.
‘괜찮을까……? 손대면 안 돼, 이건 남의 거잖아?’
홍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생각했다.
‘괜찮을 거야. 나는 안 먹을 거야. 참을 수 있어. 어린 동생과 아프신 엄마 몫만, 아주 조금만……, 두 줌만 가져갈 거니까. 괜찮을 거야. 하늘도 눈 감아 주실 거야.’
아이는 멈췄던 손으로 힘껏 콩을 잡아당겼다. 아이가 치마폭에다 콩을 두어줌 훑어 담았다. 콩을 보자 홍두의 머리에 엄마와 어린 동생의 활짝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웬 놈이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고함을 쳤다.
“헉! 어떡하지?”
홍두는 뒤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리가 제 맘대로 후들거렸다.
“웬 놈이 남의 밭에서 콩을 훔치는 게여? 당장 나오지 못해!”
뒤에서 들리는 고함소리가 지게작대기로 콩밭 둔덕을 냅다 후려쳤다. 겁에 질린 홍두가 콩을 쥔 채 밭고랑에서 간신히 일어났다. 고함소리의 주인공이 홍두의 뒷덜미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너! 잘 걸렸다. 그동안 계속 콩을 훔쳐간 도둑이 너여? 대체 누가 콩을 훔쳐가나 했는데 오늘 딱 걸렸네.”
눈앞이 캄캄해진 홍두가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아니에요. 저는 오늘 처음 훔쳤어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듣기 싫어! 냉큼 따라와!”
그가 홍두의 덜미를 잡고 마을로 내려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홍두는 두려워 심장이 요동쳤다. 행랑아범이 잔뜩 겁에 질린 홍두를 마당에 꿇렸다. 그러고는 굳게 닫힌 장지문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나리. 나리.”
“무슨 일이냐?”
방문은 열리지 않고 음성만 들려왔다. 행랑아범이 홍두를 한번 힐끗 보더니 아뢰었다.
“콩 도둑놈을 잡았습니다요. 이놈을 어찌할깝쇼?”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한 선비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성호 이익이었다.
“콩 도둑을 잡았다고?”
성호 이익이 홍두의 차림새를 찬찬히 살폈다.
“이 아이냐?”
홍두의 차림새는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가을이 왔지만 홍두의 옷은 아직도 얇은 여름옷이었다. 더구나 심하게 낡아 이곳저곳 꿰맨 상태였다. 그러나 아이의 눈은 선했고 총기가 있었다. 전혀 근본이 없는 아이 같지 않았다. 성호 이익이 홍두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 네가 콩을 훔쳤느냐?”
홍두는 떨리는 목소리로 용기 냈다.
“나, 나리, 저는 개울 건너 사는 홍두라 하옵니다. 제가 나리의 콩을 훔친 것은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정말 오늘 처음 훔쳤습니다. 예전에는 절대 훔친 적이 없습니다. 나리,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성호 이익이 궁금한 듯 홍두에게 물었다.
“그래, 너는 왜 콩을 훔쳤느냐?”
홍두는 집안사정을 상세히 아뢰었다. 사정을 들은 성호 이익이 행랑아범에게 일렀다.
“저 아이를 배불리 먹여 보내줘라. 어린 것이, 제 배를 채우려한 것도 아니고 갓 태어난 동생과 어머니를 주려고 그랬다니 죄를 묻지 않겠다.”
행랑어멈이 홍두를 데려가 배불리 먹였다. 성호 이익은 행랑아범을 시켜 뭔가를 내오게 했다. 잠시 후, 행랑어멈이 뭔가를 머리에 이고, 남종은 지게에 지고 나왔다. 성호 이익이 홍두를 향해 말했다.
“이것은 오늘 만든 콩죽과 두부, 그리고 비지라는 것이다. 가져가서 우선 급한 대로 양식을 하여라. 그리고 이것은 콩에서 짠 두유다. 집에 가자마자 네 동생과 어머니에게 천천히 마시게 해라. 그리고 이것은 이번에 수확한 햇콩 한말이다. 내가 이것을 네 집으로 보내줄 것이다. 앞으로는 그 착한 얼굴로 도둑질 하지 말고, 내게 와서 필요한 만큼씩 콩을 가져가거라. 알았느냐?”
깜짝 놀란 홍두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나리, 잘못을 저지른 저에게 귀한 것을 이리도 많이 주시다니요? 정말 감사하옵니다.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지게에 햇콩 한말을 실은 머슴이 앞장섰다. 그 뒤를 행랑어멈이 머리에 양푼을 이고 뒤따랐다. 홍두가 대문을 향하는데 성호 이익이 아이를 다시 불러 세웠다.
“얘야, 이것도 가져가거라. 가는 길에 이걸 천천히 씹어 먹어라. 볶은 콩이다. 아주 고소할게야. 허허허.”
성호 이익이 자신의 간식이 담긴 복주머니를 끌러 홍두에게 건넸다. 홍두는 눈물이 날만큼 감사했다. 아이는 복주머니를 두 손으로 받고 여러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서둘러 돌아서다 그만, 바닥에 콩알을 흘리고 말았다. 당황한 홍두가 땅바닥에 흘린 콩을 급히 주워 복주머니에 담았다. 그러고 나서 대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 때 성호 이익이 마루에서 홍두를 다시 불렀다.
“얘야. 잠시만 기다려라.”
홍두가 무슨 일인가 돌아봤다. 성호 이익이 버선발로 내려와 마루 밑을 살폈다. 그곳에 떨어진 볶은 콩 한 알을 마저 주워 입으로 호호 불었다. 이익이 정성껏 먼지를 턴 볶은 콩 한 알을 아이 손에 건네주었다.
“이 귀한 콩 한 알이 저기에 떨어져 있지 뭐냐. 허허허. 홍두야, 소중한 곡식 흘리지 말거라. 콩은 아주 소중한 것이다. 이 한 알 속에는, 오늘처럼 지친 너에게 이십 걸음을 걷게 해줄 귀한 영양가가 들어 있느니라. 내말 잊지 말거라. 알았느냐?”
홍두가 해맑게 웃었다.
“네! 나리. 그 말씀 꼭 명심하고 콩 한 알도 감사히 아껴 먹겠습니다.”
홍두가 환해진 얼굴로 대문을 나섰다. 홍두는 그날 성호 이익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살아갔다.
몇 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백성이 굶지 않고 배불리 먹는 방법은 이익에게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익은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콩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동안 콩을 연구하며 얻은 값진 경험담을『성호사설』이라는 서책에 꼼꼼히 기록했다.
나는 가난살이에 능숙한데, 좋은 품질의 콩을 구하다가, 붉은 빛깔의 씨알이 굵고 껍질이 부드러운 것을 얻어서 쌀에 섞어 밥을 지었더니 맛이 달아서 도리어 낫기에, 드디어 미숙(米菽)의 노래를 지어 가난한 집안에 돌려보였다. 그 후에 검은 점이 박힌 것, 푸른 것, 희면서 살짝 누른 것들을 얻었는데, 씨알의 굵기가 다 보통 것과 달라서 전자의 붉은 것과 흡사하며, 흰 것은 더욱 나아서 껍질이 엷어 익으면 쩍쩍 벌어지곤 한다. 그래서 항아리의 곡식이 이를 힘입어 자못 절약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붉은 것을 이름 하여 불콩[火菽]이라 하고, 점박이는 얼룩콩[斑菽], 푸른 것은 파랑콩, 흰 것은 점콩[黇菽]이라 했다. ‘점(黇)’이란 밀갈색(蜜褐色)이다.
성호 이익은 이렇게 글을 짓고 [반숙철숙(半菽啜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허허허.”
이익은 여러 번 곱씹어 읽으며 흡족해했다.
사계절이 네 번 바뀌고 가을이 왔다. 논두렁과 강가와 산비탈마다 누군가 심은 콩들이 고소하게 익어갔다. 기와집 담장과 울타리에도 얼룰덜룩한 넝쿨 콩들이 줄줄이 매달려 그네를 탔다. 그것들은 가을바람에 잘그락 잘그락 소리를 내며 동글동글 여물어갔다.
성호 이익은 어느 새 73세가 되었다. 1753년(영조 29)에 의미 있는 삼두회 모임을 열었다. 삼두회는 이익의 집안 남정네들의 모임이었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소년과 청년 중년과 노인들까지 연령이 다양했다. 그 중 가장 어른은 성호 이익이었다. 어른들이 둘러앉은 각각의 독상에 음식이 나왔다. 콩죽과 콩나물과 된장 한 종지, 세 가지가 차려졌다. 콩죽은 흰콩을 반나절 정도 불린 후, 적당한 물과 함께 콩이 완전히 무를 때까지 솥에 푹 삶았다. 물렁하게 삶은 콩을 맷돌에 곱게 갈고 그것을 고운 채에 걸렀다. 채에 걸러 아래로 모아진 고운 콩물로 콩죽을 쑤었다. 여기에 콩나물을 썰어 넣고 뭉근히 죽을 쑤면, 쓰러진 사람도 벌떡 일어서게 해줄 콩죽이 탄생했다. 이것을 흰 그릇에 얌전히 담으면 먹기도 전에 그 빛깔이 보는 이를 즐겁게 했다. 그릇에 곱게 담긴 콩죽은 마치, 추운 겨울을 뚫고 봄에 피는 첫 꽃처럼 빛깔이 샛노랗고 고왔다. 콩죽은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빼어났다. 이것은 특별한 양념도 필요 없었다. 단지 소금만 넣었을 뿐인데도 그 고소함이 그대로 살아나 진한 콩 맛이 넘쳐났다. 황금빛 호박죽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콩죽을 떠먹다가 약간 입 안이 지루할 쯤, 기다렸던 콩나물이 제 역할을 해주었다.
콩나물을 키울 때는 잘 여문 콩을 물에 불리고 물이 잘 빠지는 시루를 준비했다. 콩을 물에 불릴 때는 완전히 잠기고 남을 만큼의 충분한 물에 반나절을 담가두었다. 물에 불린 콩을, 바닥에 천을 깔아놓은 시루에 고루 펴서 담고 매일 다섯 번이나 여섯 번 물을 충분히 주었다. 콩나물 몸체가 맑게 씻겨 내려가도록 매번 물을 충분히 주어 길렀다. 물이 따뜻하면 빨리 자라지만 부패하기 쉬웠다. 그리고 물이 너무 차가우면 콩나물의 성장 속도가 느렸다. 성호 이익은 이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중간 정도의 미지근한 물을 찾아냈다. 콩나물을 키울 때는 빛이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키웠다. 시루 위에 검은 천을 씌워주었더니 다 클 때까지 노랗고 아삭거리는 건강한 콩나물을 보게 되었다. 콩나물은 이틀 사흘이면 쑥쑥 자랐다. 닷새나 엿새면 한줌씩 뽑아서 고소하고 아삭거리는 콩나물을 해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한줌 뽑은 콩나물을 물에 잘 씻고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비린 냄새가 사라지면 바로 건져 찬 물에 헹궈주었다. 헹궈낸 콩나물에 참기름과 마늘과 소금을 약간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상에 올렸다.
된장은 삼두회 밥상에서 마지막까지 회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된장은 곡물의 부족한 여러 영양소를 동시에 섭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등공신이었다. 삼두회 회원들은 된장을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맛있게 잘 담근 된장만 있으면 되었다. 회원들은, 오늘처럼 찬바람 부는 가을에 따뜻하고 고소한 콩죽과 아삭거리는 콩나물과 구수하고 짭조름한 된장을 먹으며 박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친 삼두회 회원들은 성호 이익에게 콩에 대한 지식을 귀담아 들었다.
“자, 다음은 콩에 관한 시를 발표하는 시간을 갖겠네. 내가 먼저 한수 읊을 터이니 자유롭게 이어가가기로 하세.”
성호 이익은 콩 찬양 시를 읊었다. 삼두회 회원들의 얼굴이 주황 파랑 분홍 흰색, 각종 콩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참석한 회원들은 순번을 정해 콩 시를 읊고 즐기고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때 밖에서 행랑아범 음성이 들렸다.
“나리, 나리. 쇤네이옵니다요.”
친인척들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던 성호 이익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냐?”
“웬 낯선 규수가 나리를 찾는뎁쇼. 지금 밖에서 기다립니다요.”
“규수라고 했느냐? 어서 이리 안내해 드려라.”
성호 이익은 자신을 찾아온 규수가 누군지 궁금했다. 잠시 후 행랑아범의 뒤를 따라 한 처자가 사뿐히 들어왔다. 머리에 곱게 댕기를 물들인 규수였다. 그녀가 성호 이익 앞에 공손히 절했다. 새하얀 저고리에 꽃분홍색 동정을 달았고 치마는 능소화보다 더 곱고 소담스럽게 수가 놓여 있었다.
“소녀, 나리께 인사 올리옵니다.”
“그래, 어쩐 일로 나를 찾았소?”
성호 이익은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음성과 옷맵시가 넘침이 없이 곱고 고요했다.
“나를 아시오? 미안하오만 나는 처자와 초면인데.”
그녀는 성호 이익을 향해 그윽하게 미소 지었다.
“나리, 저…… 홍두이옵니다. 4년 전 나리 콩 밭에서 콩을 두 줌 훔치다 들켰지요. 호호호.”
“앗, 네가 홍두냐? 그날의 홍두가 이리 과년하게 자란 것이냐? 허허. 전혀 몰라봤느니라. 몰라봤어. 허허허. 세월이 벌써 이렇게 간 것이냐? 반갑구나. 부모님은 무탈하시냐? 동생도?”
성호 이익과 홍두는 환하게 안부를 나누었다.
“나리 덕분에 큰 은혜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작은 자리를 얻게 되어 지금은 옛이야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날 나리께서 제게 주신 복주머니가 저희 가족에게 큰 복이 된듯하옵니다. 모두가 나리 은공이옵니다.”
“허허허. 아주 경사로구나. 기쁜 일이야. 그러나 그게 어디 내가 한 일이더냐? 모두 콩이 이룬 공이지.”
안에서는 삼두회 회원들이 박장대소하고 흥겨운 음성이 들려왔다. 성호 이익이 홍두를 보았다
“지금 삼두회 모임 중이었느니라. 남정네들 모임이긴 허나, 어떠냐? 온 김에 잠시 인사나 나누고 가겠느냐? 너만 괜찮다면 내가 안내해 주마.”
홍두는 검고 영롱한 눈으로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나리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겸사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오, 그래? 우선 안으로 들자꾸나. 허허허. 참 몰라보게 자랐구나. 기특하다.”
성호 이익이 들썩이던 삼두회 모임을 잠시 환기시켰다.
“내가 오늘 우리 삼두회 회원들 앞에 특별히 한 처자를 소개할까 하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 하나 우리 삼두회 안에서야 그런 담장이 필요한가? 아닐 거라 믿네. 이 처자는 홍두라는 아이일세. 몇 년 전 나와 인연이 되었던 아이인데, 오늘 이렇게 과년하게 자라 나를 찾아왔다네. 해서 오늘 삼두회 회원들의 시를 감상해보라 할까 하는데 어떤가?”
“좋습니다.”
회원들은 흔쾌히 반겨주었다.
“따지고 보면, 홍두도 우리 삼두회 회원 자격이 되고도 남는다네. 이 아이도 우리처럼 콩과 아주 인연이 깊은 아이일세. 허허허.”
성호 이익이 자신의 간식이 담긴 복주머니를 끌러 홍두에게 건넸다. 홍두는 눈물이 날만큼 감사했다. 아이는 복주머니를 두 손으로 받고 여러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서둘러 돌아서다 그만, 바닥에 콩알을 흘리고 말았다. 당황한 홍두가 땅바닥에 흘린 콩을 급히 주워 복주머니에 담았다. 그러고 나서 대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 때 성호 이익이 마루에서 홍두를 다시 불렀다.
“얘야. 잠시만 기다려라.”
홍두가 무슨 일인가 돌아봤다. 성호 이익이 버선발로 내려와 마루 밑을 살폈다. 그곳에 떨어진 볶은 콩 한 알을 마저 주워 입으로 호호 불었다. 이익이 정성껏 먼지를 턴 볶은 콩 한 알을 아이 손에 건네주었다.
“이 귀한 콩 한 알이 저기에 떨어져 있지 뭐냐. 허허허. 홍두야, 소중한 곡식 흘리지 말거라. 콩은 아주 소중한 것이다. 이 한 알 속에는, 오늘처럼 지친 너에게 이십 걸음을 걷게 해줄 귀한 영양가가 들어 있느니라. 내말 잊지 말거라. 알았느냐?”
홍두가 해맑게 웃었다.
“네! 나리. 그 말씀 꼭 명심하고 콩 한 알도 감사히 아껴 먹겠습니다.”
홍두가 환해진 얼굴로 대문을 나섰다. 홍두는 그날 성호 이익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살아갔다.
몇 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백성이 굶지 않고 배불리 먹는 방법은 이익에게 중요한 관심사였다. 이익은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콩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동안 콩을 연구하며 얻은 값진 경험담을『성호사설』이라는 서책에 꼼꼼히 기록했다.
나는 가난살이에 능숙한데, 좋은 품질의 콩을 구하다가, 붉은 빛깔의 씨알이 굵고 껍질이 부드러운 것을 얻어서 쌀에 섞어 밥을 지었더니 맛이 달아서 도리어 낫기에, 드디어 미숙(米菽)의 노래를 지어 가난한 집안에 돌려보였다. 그 후에 검은 점이 박힌 것, 푸른 것, 희면서 살짝 누른 것들을 얻었는데, 씨알의 굵기가 다 보통 것과 달라서 전자의 붉은 것과 흡사하며, 흰 것은 더욱 나아서 껍질이 엷어 익으면 쩍쩍 벌어지곤 한다. 그래서 항아리의 곡식이 이를 힘입어 자못 절약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붉은 것을 이름 하여 불콩[火菽]이라 하고, 점박이는 얼룩콩[斑菽], 푸른 것은 파랑콩, 흰 것은 점콩[黇菽]이라 했다. ‘점(黇)’이란 밀갈색(蜜褐色)이다.
성호 이익은 이렇게 글을 짓고 [반숙철숙(半菽啜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허허허.”
이익은 여러 번 곱씹어 읽으며 흡족해했다.
사계절이 네 번 바뀌고 가을이 왔다. 논두렁과 강가와 산비탈마다 누군가 심은 콩들이 고소하게 익어갔다. 기와집 담장과 울타리에도 얼룰덜룩한 넝쿨 콩들이 줄줄이 매달려 그네를 탔다. 그것들은 가을바람에 잘그락 잘그락 소리를 내며 동글동글 여물어갔다.
성호 이익은 어느 새 73세가 되었다. 1753년(영조 29)에 의미 있는 삼두회 모임을 열었다. 삼두회는 이익의 집안 남정네들의 모임이었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소년과 청년 중년과 노인들까지 연령이 다양했다. 그 중 가장 어른은 성호 이익이었다. 어른들이 둘러앉은 각각의 독상에 음식이 나왔다. 콩죽과 콩나물과 된장 한 종지, 세 가지가 차려졌다. 콩죽은 흰콩을 반나절 정도 불린 후, 적당한 물과 함께 콩이 완전히 무를 때까지 솥에 푹 삶았다. 물렁하게 삶은 콩을 맷돌에 곱게 갈고 그것을 고운 채에 걸렀다. 채에 걸러 아래로 모아진 고운 콩물로 콩죽을 쑤었다. 여기에 콩나물을 썰어 넣고 뭉근히 죽을 쑤면, 쓰러진 사람도 벌떡 일어서게 해줄 콩죽이 탄생했다. 이것을 흰 그릇에 얌전히 담으면 먹기도 전에 그 빛깔이 보는 이를 즐겁게 했다. 그릇에 곱게 담긴 콩죽은 마치, 추운 겨울을 뚫고 봄에 피는 첫 꽃처럼 빛깔이 샛노랗고 고왔다. 콩죽은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빼어났다. 이것은 특별한 양념도 필요 없었다. 단지 소금만 넣었을 뿐인데도 그 고소함이 그대로 살아나 진한 콩 맛이 넘쳐났다. 황금빛 호박죽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콩죽을 떠먹다가 약간 입 안이 지루할 쯤, 기다렸던 콩나물이 제 역할을 해주었다.
콩나물을 키울 때는 잘 여문 콩을 물에 불리고 물이 잘 빠지는 시루를 준비했다. 콩을 물에 불릴 때는 완전히 잠기고 남을 만큼의 충분한 물에 반나절을 담가두었다. 물에 불린 콩을, 바닥에 천을 깔아놓은 시루에 고루 펴서 담고 매일 다섯 번이나 여섯 번 물을 충분히 주었다. 콩나물 몸체가 맑게 씻겨 내려가도록 매번 물을 충분히 주어 길렀다. 물이 따뜻하면 빨리 자라지만 부패하기 쉬웠다. 그리고 물이 너무 차가우면 콩나물의 성장 속도가 느렸다. 성호 이익은 이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중간 정도의 미지근한 물을 찾아냈다. 콩나물을 키울 때는 빛이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키웠다. 시루 위에 검은 천을 씌워주었더니 다 클 때까지 노랗고 아삭거리는 건강한 콩나물을 보게 되었다. 콩나물은 이틀 사흘이면 쑥쑥 자랐다. 닷새나 엿새면 한줌씩 뽑아서 고소하고 아삭거리는 콩나물을 해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한줌 뽑은 콩나물을 물에 잘 씻고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비린 냄새가 사라지면 바로 건져 찬 물에 헹궈주었다. 헹궈낸 콩나물에 참기름과 마늘과 소금을 약간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상에 올렸다.
된장은 삼두회 밥상에서 마지막까지 회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된장은 곡물의 부족한 여러 영양소를 동시에 섭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등공신이었다. 삼두회 회원들은 된장을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맛있게 잘 담근 된장만 있으면 되었다. 회원들은, 오늘처럼 찬바람 부는 가을에 따뜻하고 고소한 콩죽과 아삭거리는 콩나물과 구수하고 짭조름한 된장을 먹으며 박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친 삼두회 회원들은 성호 이익에게 콩에 대한 지식을 귀담아 들었다.
“자, 다음은 콩에 관한 시를 발표하는 시간을 갖겠네. 내가 먼저 한수 읊을 터이니 자유롭게 이어가가기로 하세.”
성호 이익은 콩 찬양 시를 읊었다. 삼두회 회원들의 얼굴이 주황 파랑 분홍 흰색, 각종 콩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참석한 회원들은 순번을 정해 콩 시를 읊고 즐기고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때 밖에서 행랑아범 음성이 들렸다.
“나리, 나리. 쇤네이옵니다요.”
친인척들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던 성호 이익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냐?”
“웬 낯선 규수가 나리를 찾는뎁쇼. 지금 밖에서 기다립니다요.”
“규수라고 했느냐? 어서 이리 안내해 드려라.”
성호 이익은 자신을 찾아온 규수가 누군지 궁금했다. 잠시 후 행랑아범의 뒤를 따라 한 처자가 사뿐히 들어왔다. 머리에 곱게 댕기를 물들인 규수였다. 그녀가 성호 이익 앞에 공손히 절했다. 새하얀 저고리에 꽃분홍색 동정을 달았고 치마는 능소화보다 더 곱고 소담스럽게 수가 놓여 있었다.
“소녀, 나리께 인사 올리옵니다.”
“그래, 어쩐 일로 나를 찾았소?”
성호 이익은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음성과 옷맵시가 넘침이 없이 곱고 고요했다.
“나를 아시오? 미안하오만 나는 처자와 초면인데.”
그녀는 성호 이익을 향해 그윽하게 미소 지었다.
“나리, 저…… 홍두이옵니다. 4년 전 나리 콩 밭에서 콩을 두 줌 훔치다 들켰지요. 호호호.”
“앗, 네가 홍두냐? 그날의 홍두가 이리 과년하게 자란 것이냐? 허허. 전혀 몰라봤느니라. 몰라봤어. 허허허. 세월이 벌써 이렇게 간 것이냐? 반갑구나. 부모님은 무탈하시냐? 동생도?”
성호 이익과 홍두는 환하게 안부를 나누었다.
“나리 덕분에 큰 은혜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작은 자리를 얻게 되어 지금은 옛이야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날 나리께서 제게 주신 복주머니가 저희 가족에게 큰 복이 된듯하옵니다. 모두가 나리 은공이옵니다.”
“허허허. 아주 경사로구나. 기쁜 일이야. 그러나 그게 어디 내가 한 일이더냐? 모두 콩이 이룬 공이지.”
안에서는 삼두회 회원들이 박장대소하고 흥겨운 음성이 들려왔다. 성호 이익이 홍두를 보았다
“지금 삼두회 모임 중이었느니라. 남정네들 모임이긴 허나, 어떠냐? 온 김에 잠시 인사나 나누고 가겠느냐? 너만 괜찮다면 내가 안내해 주마.”
홍두는 검고 영롱한 눈으로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나리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겸사해서 찾아뵈었습니다.”
“오, 그래? 우선 안으로 들자꾸나. 허허허. 참 몰라보게 자랐구나. 기특하다.”
성호 이익이 들썩이던 삼두회 모임을 잠시 환기시켰다.
“내가 오늘 우리 삼두회 회원들 앞에 특별히 한 처자를 소개할까 하네. 비록 남녀가 유별하다 하나 우리 삼두회 안에서야 그런 담장이 필요한가? 아닐 거라 믿네. 이 처자는 홍두라는 아이일세. 몇 년 전 나와 인연이 되었던 아이인데, 오늘 이렇게 과년하게 자라 나를 찾아왔다네. 해서 오늘 삼두회 회원들의 시를 감상해보라 할까 하는데 어떤가?”
“좋습니다.”
회원들은 흔쾌히 반겨주었다.
“따지고 보면, 홍두도 우리 삼두회 회원 자격이 되고도 남는다네. 이 아이도 우리처럼 콩과 아주 인연이 깊은 아이일세. 허허허.”
홍두가 고운 자태로 공손히 예를 갖추고 회원들 앞에 섰다.
“홍두라 하옵니다. 성호 이익 나리께 오래전 큰 은혜를 입었사온데, 이제야 인사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리 앞에서 제가 누추하고 부족하지만 은혜의 보답으로 시 한수 읊어 올려도 되올런지요? 저도 콩에 관한 시를 준비했습니다.”
“옳거니! 좋지! 어서 해보시게.”
삼두회 회원 모두 흔쾌히 환영했다. 성호 이익도 기특하게 잘 자라준 홍두가 대견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좋소이다. 어서 들어봅시다. 허허허.”
홍두가 성호 이익을 향해 잠시 눈인사를 하고 삼두회 회원을 향해 섰다.
“저는 학식도 없고, 배움도 없는지라 언문(言文)으로 올림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북적였던 삼두회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모두 귀를 열었다. 회원들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홍두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짧은 시를 읊었다.
“시 제목은 <콩 한 알, 이십 걸음>이옵니다.”
“홍두라 하옵니다. 성호 이익 나리께 오래전 큰 은혜를 입었사온데, 이제야 인사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리 앞에서 제가 누추하고 부족하지만 은혜의 보답으로 시 한수 읊어 올려도 되올런지요? 저도 콩에 관한 시를 준비했습니다.”
“옳거니! 좋지! 어서 해보시게.”
삼두회 회원 모두 흔쾌히 환영했다. 성호 이익도 기특하게 잘 자라준 홍두가 대견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좋소이다. 어서 들어봅시다. 허허허.”
홍두가 성호 이익을 향해 잠시 눈인사를 하고 삼두회 회원을 향해 섰다.
“저는 학식도 없고, 배움도 없는지라 언문(言文)으로 올림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북적였던 삼두회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모두 귀를 열었다. 회원들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홍두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짧은 시를 읊었다.
“시 제목은 <콩 한 알, 이십 걸음>이옵니다.”
콩 한 알, 이십 걸음
콩 한 알로 이십 걸음 간다는 걸 그날 처음 배웠네
황금 같은 그 말씀으로 온 가족 다시 일어섰고
나도 이 세상에서 콩처럼 필요한 사람 되려 하네
콩 한 알로 이십 걸음 간다는 걸 그날 처음 배웠네
황금 같은 그 말씀으로 온 가족 다시 일어섰고
나도 이 세상에서 콩처럼 필요한 사람 되려 하네
시를 읊은 홍두의 얼굴이 부끄러워 발개졌다. 성호 이익은 시 내용을 듣고, 오래전 홍두에게 자신이 당부했던 말임을 알 수 있었다. 홍두는 성호 이익의 그 말을 지금껏 잊지 않고 지표로 삼아온 것이었다. 이익은 그런 홍두를 보며 가슴이 한없이 따뜻해졌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삼두회 회원 모두 그날 홍두의 시를 칭찬하며 헤어졌다. 성호 이익도 홍두를 대견했다. 어느새 마을에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인사를 올리고 저만치 멀어지는 홍두를 이익이 불렀다.
“홍두야. 그런데 네 이름의 의미는 무엇이냐? 그것이 늘 궁금했느니라.”
어둠 저쪽에서 홍두가 예를 갖추고 대답했다.
“나리, 제 어미가 저를 태중에 가지셨을 때 붉고 화려한 콩을 태몽으로 꾸셨다 하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홍두라 지었다 하옵니다.”
“태몽으로 붉은 콩이라? 홍두야 너는 탄생부터 이미 삼두회 회원이었던 게로구나. 허허허. 묘한 인연이로고. 늦었구나. 조심해 가거라.”
“예. 나리. 이만 물러가옵니다.”
홍두가 목례를 하고 돌아서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성호 이익은 회원들의 시를 정성껏 묶고 [삼두회시서(三豆會詩序)]를 써내려갔다.
곡식 가운데 중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벼․보리․콩으로 그 중에서도 콩이 천하다. 하지만 굶주림을 구제하는 데는 콩만 한 것이 없다. 봄가을에 벼와 보리가 없으면 ‘근심한다.[憫之]’라고 쓰고, 서리가 내려 콩이 죽지 않으면 ‘다행이다.[幸之]’라고 쓴다. … (중략) … 보리가 마르고 콩이 없으면 가을에 의지할 것이 모자란다.
삼두회시 서문을 완성한 후에도 그의 가슴에서 콩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성호 이익은 새벽닭이 울 때까지 콩에 대한 깨달음을 더 써내려갔다.
콩은 오곡(五糓)에 하나를 차지한 것인데, 사람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곡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주장을 삼는다면 콩의 힘이 가장 큰 것이다. 후세 백성들에는 잘사는 이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으므로,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다 귀현(貴顯)한 자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가난한 백성이 얻어먹고 목숨을 잇는 것은 오직 이 콩뿐이었다. … (중략) … 맷돌에 갈아 진액만 취해서 두부를 만들면 남은 찌끼도 얼마든지 많은데, 끓여서 국을 만들면 구수한 맛이 먹음직하다. 또는 싹을 내서 콩나물로 만들면 몇 갑절이 더해진다. 가난한 자는 콩을 갈고 콩나물을 썰어서 한데 합쳐 죽을 만들어 먹는데 족히 배를 채울 수 있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이런 일들을 익히 알기 때문에 대강 적어서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는 자에게 보이고 깨닫도록 하고자 한다.
글을 마치고 제목을 [만물문 / 숙(菽)]이라 적었다. 이익은 콩을 구해 관찰하고 직접 밥을 지어 실험한 내용도 기록했다. 각각의 콩 모양에 맞게 이름을 붙였고 콩밥에 대한 시문도 지었다. 그는 또 골몰히 생각했다.
‘콩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겨야 한다. 콩의 효용가치를 널리 알려야 해. 옳지! 두부도 적어야겠다.’
성호 이익의 붓은 새벽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두부(豆腐)에 대해 또 적어 내려갔다.
지금 식품 중에 두부(豆腐)란 것이 있다. 콩을 맷돌로 갈아 끓여 익혀서 포대에 넣어 거른 다음 염즙(鹽汁)을 넣으면 바로 엉키게 되고, 두장(豆醬)은 조금만 넣어도 삭아서 엉키지 않는다. 염즙이란 것은 소금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즙이고, 두장 역시 끓인 콩을 소금에 섞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염즙을 넣으면 두부가 제대로 엉키고 두장 물을 넣으면 삭아져서 엉키지 않으니, 그 이치를 궁구하기 어렵다. 쌀뜨물[米泔] 역시 삭아지게 하기 때문에, 두부를 먹고 체증이 생긴 자는 쌀뜨물을 마시면 바로 낫는다고 한다.
성호 이익은 1753년(영조29) 경기도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도 사비를 털어 콩으로 백성을 구하고 도왔다.
“자, 어서들 드시오. 굶주림을 모면하는데 이 콩만 한 것이 없소. 천천히 많이 먹고 힘을 내시오.”
이익은 흉년이 들면 반드시 콩을 삶았다. 그것으로 정성껏 콩죽을 만들어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그들을 위로했다. 그는 말년으로 갈수록 더 살림이 기울었다. 성호 이익에게 청렴과 자족이라는 이름의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검소한 삶으로 가난한 백성을 콩으로 배불리 먹였고 이롭게 했으며 극진히 사랑했다. 성호 이익은 굶주린 자들을 구제하고 콩의 실질적인 효용가치를 세상에 전하는데 인생을 바쳤다. 그 후 82세까지 장수하다 콩처럼 땅 속으로 영원히 돌아갔다.
“홍두야. 그런데 네 이름의 의미는 무엇이냐? 그것이 늘 궁금했느니라.”
어둠 저쪽에서 홍두가 예를 갖추고 대답했다.
“나리, 제 어미가 저를 태중에 가지셨을 때 붉고 화려한 콩을 태몽으로 꾸셨다 하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홍두라 지었다 하옵니다.”
“태몽으로 붉은 콩이라? 홍두야 너는 탄생부터 이미 삼두회 회원이었던 게로구나. 허허허. 묘한 인연이로고. 늦었구나. 조심해 가거라.”
“예. 나리. 이만 물러가옵니다.”
홍두가 목례를 하고 돌아서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성호 이익은 회원들의 시를 정성껏 묶고 [삼두회시서(三豆會詩序)]를 써내려갔다.
곡식 가운데 중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벼․보리․콩으로 그 중에서도 콩이 천하다. 하지만 굶주림을 구제하는 데는 콩만 한 것이 없다. 봄가을에 벼와 보리가 없으면 ‘근심한다.[憫之]’라고 쓰고, 서리가 내려 콩이 죽지 않으면 ‘다행이다.[幸之]’라고 쓴다. … (중략) … 보리가 마르고 콩이 없으면 가을에 의지할 것이 모자란다.
삼두회시 서문을 완성한 후에도 그의 가슴에서 콩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성호 이익은 새벽닭이 울 때까지 콩에 대한 깨달음을 더 써내려갔다.
콩은 오곡(五糓)에 하나를 차지한 것인데, 사람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곡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주장을 삼는다면 콩의 힘이 가장 큰 것이다. 후세 백성들에는 잘사는 이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으므로,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다 귀현(貴顯)한 자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가난한 백성이 얻어먹고 목숨을 잇는 것은 오직 이 콩뿐이었다. … (중략) … 맷돌에 갈아 진액만 취해서 두부를 만들면 남은 찌끼도 얼마든지 많은데, 끓여서 국을 만들면 구수한 맛이 먹음직하다. 또는 싹을 내서 콩나물로 만들면 몇 갑절이 더해진다. 가난한 자는 콩을 갈고 콩나물을 썰어서 한데 합쳐 죽을 만들어 먹는데 족히 배를 채울 수 있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이런 일들을 익히 알기 때문에 대강 적어서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는 자에게 보이고 깨닫도록 하고자 한다.
글을 마치고 제목을 [만물문 / 숙(菽)]이라 적었다. 이익은 콩을 구해 관찰하고 직접 밥을 지어 실험한 내용도 기록했다. 각각의 콩 모양에 맞게 이름을 붙였고 콩밥에 대한 시문도 지었다. 그는 또 골몰히 생각했다.
‘콩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겨야 한다. 콩의 효용가치를 널리 알려야 해. 옳지! 두부도 적어야겠다.’
성호 이익의 붓은 새벽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두부(豆腐)에 대해 또 적어 내려갔다.
지금 식품 중에 두부(豆腐)란 것이 있다. 콩을 맷돌로 갈아 끓여 익혀서 포대에 넣어 거른 다음 염즙(鹽汁)을 넣으면 바로 엉키게 되고, 두장(豆醬)은 조금만 넣어도 삭아서 엉키지 않는다. 염즙이란 것은 소금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즙이고, 두장 역시 끓인 콩을 소금에 섞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염즙을 넣으면 두부가 제대로 엉키고 두장 물을 넣으면 삭아져서 엉키지 않으니, 그 이치를 궁구하기 어렵다. 쌀뜨물[米泔] 역시 삭아지게 하기 때문에, 두부를 먹고 체증이 생긴 자는 쌀뜨물을 마시면 바로 낫는다고 한다.
성호 이익은 1753년(영조29) 경기도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도 사비를 털어 콩으로 백성을 구하고 도왔다.
“자, 어서들 드시오. 굶주림을 모면하는데 이 콩만 한 것이 없소. 천천히 많이 먹고 힘을 내시오.”
이익은 흉년이 들면 반드시 콩을 삶았다. 그것으로 정성껏 콩죽을 만들어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그들을 위로했다. 그는 말년으로 갈수록 더 살림이 기울었다. 성호 이익에게 청렴과 자족이라는 이름의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검소한 삶으로 가난한 백성을 콩으로 배불리 먹였고 이롭게 했으며 극진히 사랑했다. 성호 이익은 굶주린 자들을 구제하고 콩의 실질적인 효용가치를 세상에 전하는데 인생을 바쳤다. 그 후 82세까지 장수하다 콩처럼 땅 속으로 영원히 돌아갔다.
자료원고 | | | 이병유 한국학중앙연구원 |
스토리원고 | | | 김명희 작가 |
성호사설 (출처:성호박물관) |
성호 이익 초상 (출처:성호박물관) |
이익 상차림 (출처:성호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