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_천천히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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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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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거라
따뜻한 바람이 후, 불어왔다.
부드러운 입술이 꽃송이들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1656년 화창한 봄. 박세당의 집 담장 안에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서상을 앞에 놓고 두 삶이 마주 앉았다. 박세당과 그의 어린 아들이었다.
“허허허, 어린 것이 곧잘 하는구나. 태보야, 천자문이 어렵지 않느냐?”
화려한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앞에는 아이의 몸체보다 큰 서책이 놓여있었다.
“재밌사옵니다.”
“허허허. 제법이구나.”
세 살이 된 어린 도령 박태보가 서책을 보다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궁금한 게 있사옵니다.”
“궁금한 것? 말해보아라.”
박세당은 총명한 아들이 한없이 귀여웠다.
“아까 아버지께서, 충칙진명(忠則盡命)’이라. ‘임금에 대한 충성은 목숨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러면, 아버지. 신하로서 왕을 섬기다 죽으면, 그것도 충이라 할 수 있습니까?”
“뭐, 뭐라고? 지금 뭐라 했느냐?”
박세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럴 수가! 이게 어찌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질문이란 말인가!’
박세당은 놀람을 감추고 대답했다.
“물론이니라. 신하는 목숨을 바쳐 왕을 섬기는 것이 옳다. 그러나……. 태보야.”
박세당은 어린 아들의 갑작스런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서운 질문이기도 했다.
“말씀하소서.”
어린 박태보는 천사 같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박세당은 잠시 생각했다.
‘…… 이거야 원. 그러나 그렇게 바쳐진 목숨이 반드시 군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던가? 도가 없는 세상에서 헛된 죽임을 당할 바에야 세상에 나아가지 않는 것도 선비의 길이 아닐까…….’
박세당은 침착하게 아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또 하자꾸나. 이만 물러가거라.”
“예. 아버지.”
어린 박태보는 아버지의 답변을 기다리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러났다.
그날 밤이었다. 박세당의 아내 남씨 부인은 곤히 잠든 아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우리 태보 어쩜 이렇게 똑똑하고 총명할까요? 호호호.”
박세당은 함께 기뻐할 수 없었다. 뭔지 모를 두려움이 앞섰다.
“부인, 앞으로 태보를 너무 칭찬해서는 안 되겠소. 나는 사실 걱정이오. 저 어린 것이 장차 이 풍파 속을 어찌 헤쳐 나갈지.”
박세당은 아들을 가르칠 때마다 기쁜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저 아이를 보는 내 마음이 왜 이리 무거울까.’
성장해가는 아들을 보며 그는 마음이 복잡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꽃송이들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1656년 화창한 봄. 박세당의 집 담장 안에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서상을 앞에 놓고 두 삶이 마주 앉았다. 박세당과 그의 어린 아들이었다.
“허허허, 어린 것이 곧잘 하는구나. 태보야, 천자문이 어렵지 않느냐?”
화려한 색동옷을 입은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앞에는 아이의 몸체보다 큰 서책이 놓여있었다.
“재밌사옵니다.”
“허허허. 제법이구나.”
세 살이 된 어린 도령 박태보가 서책을 보다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궁금한 게 있사옵니다.”
“궁금한 것? 말해보아라.”
박세당은 총명한 아들이 한없이 귀여웠다.
“아까 아버지께서, 충칙진명(忠則盡命)’이라. ‘임금에 대한 충성은 목숨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러면, 아버지. 신하로서 왕을 섬기다 죽으면, 그것도 충이라 할 수 있습니까?”
“뭐, 뭐라고? 지금 뭐라 했느냐?”
박세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럴 수가! 이게 어찌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질문이란 말인가!’
박세당은 놀람을 감추고 대답했다.
“물론이니라. 신하는 목숨을 바쳐 왕을 섬기는 것이 옳다. 그러나……. 태보야.”
박세당은 어린 아들의 갑작스런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서운 질문이기도 했다.
“말씀하소서.”
어린 박태보는 천사 같은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박세당은 잠시 생각했다.
‘…… 이거야 원. 그러나 그렇게 바쳐진 목숨이 반드시 군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던가? 도가 없는 세상에서 헛된 죽임을 당할 바에야 세상에 나아가지 않는 것도 선비의 길이 아닐까…….’
박세당은 침착하게 아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또 하자꾸나. 이만 물러가거라.”
“예. 아버지.”
어린 박태보는 아버지의 답변을 기다리다 고개를 갸웃하며 물러났다.
그날 밤이었다. 박세당의 아내 남씨 부인은 곤히 잠든 아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우리 태보 어쩜 이렇게 똑똑하고 총명할까요? 호호호.”
박세당은 함께 기뻐할 수 없었다. 뭔지 모를 두려움이 앞섰다.
“부인, 앞으로 태보를 너무 칭찬해서는 안 되겠소. 나는 사실 걱정이오. 저 어린 것이 장차 이 풍파 속을 어찌 헤쳐 나갈지.”
박세당은 아들을 가르칠 때마다 기쁜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저 아이를 보는 내 마음이 왜 이리 무거울까.’
성장해가는 아들을 보며 그는 마음이 복잡했다.
1659년 박태보가 다섯 살이 되고 어느 날이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지만 조정은 나날이 먹구름이 밀려들었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박세당이 뜨락을 서성였다. 머리에 금박이 수놓인 복건을 쓰고 긴 조끼처럼 생긴 전복을 단정히 입고 마당에서 놀고 있는 한 아이. 어린 박태보는 무언가를 보며 까르르, 박수쳤다. 조막만한 갓신을 신고 깡총깡총 발을 굴렀다. 천진난만한 모습은 천사처럼 해맑고 귀여웠다.
“어서 가. 빨리. 더 빨리.”
박세당이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다가갔다.
“태보야, 무엇을 보느냐?”
“개미를 보옵니다.”
태보는 마당에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떼를 보며 신기해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뒤에 쳐진 개미 한 마리를 집어 맨 앞에 놓아주었다. 그 모습을 본 박세당이 물었다.
“개미를 왜 그리 하는 게냐?”
“앞에 빨리 가라고요.”
“빨리?”
“예.”
“태보야. 빨리 가면 뭐가 좋으냐?”
“더 많은 걸 볼 수 있어요. 다른 개미보다 앞에 가야해요.”
태보는 개미를 따라가며 밝게 웃었다. 박세당이 염려스러워 물었다.
“태보야. 빨리 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란다. 빨리 가면 주변을 찬찬히 살피기 어려운 경우도 있단다. 우리 눈엔 뒤에 가는 개미가 느려보여도, 저 개미는 더 많은 경치를 보며 기뻐할지도 모르지 않느냐? 뒤에서 보는 세상도 있다는 걸 알아야한다. 태보야. 맨 앞에 가는 개미는, 춥고 힘드니라.”
“왜 추워요?”
박세당이 맨 앞의 개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를 보거라. 앞에 가는 개미는, 거친 바람을 가장 먼저 맞느니라. 태보야, 저 개미가 말을 할 줄 안다면, 너무 힘들고 춥다고, 자리를 바꾸고 싶다고 할지도 모르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당부에도 어린 박태보는 맨 앞에 가는 개미만 응원했다.
“이만 들어가자.”
박세당은 아들을 품에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태보야. 너무 서두르면 중요한 것을 놓치느니라. 애비 말 명심하여라. 알겠느냐?”
“예. 아버지.”
하늘은 높고 푸르렀지만 조정은 나날이 먹구름이 밀려들었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박세당이 뜨락을 서성였다. 머리에 금박이 수놓인 복건을 쓰고 긴 조끼처럼 생긴 전복을 단정히 입고 마당에서 놀고 있는 한 아이. 어린 박태보는 무언가를 보며 까르르, 박수쳤다. 조막만한 갓신을 신고 깡총깡총 발을 굴렀다. 천진난만한 모습은 천사처럼 해맑고 귀여웠다.
“어서 가. 빨리. 더 빨리.”
박세당이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다가갔다.
“태보야, 무엇을 보느냐?”
“개미를 보옵니다.”
태보는 마당에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떼를 보며 신기해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뒤에 쳐진 개미 한 마리를 집어 맨 앞에 놓아주었다. 그 모습을 본 박세당이 물었다.
“개미를 왜 그리 하는 게냐?”
“앞에 빨리 가라고요.”
“빨리?”
“예.”
“태보야. 빨리 가면 뭐가 좋으냐?”
“더 많은 걸 볼 수 있어요. 다른 개미보다 앞에 가야해요.”
태보는 개미를 따라가며 밝게 웃었다. 박세당이 염려스러워 물었다.
“태보야. 빨리 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란다. 빨리 가면 주변을 찬찬히 살피기 어려운 경우도 있단다. 우리 눈엔 뒤에 가는 개미가 느려보여도, 저 개미는 더 많은 경치를 보며 기뻐할지도 모르지 않느냐? 뒤에서 보는 세상도 있다는 걸 알아야한다. 태보야. 맨 앞에 가는 개미는, 춥고 힘드니라.”
“왜 추워요?”
박세당이 맨 앞의 개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를 보거라. 앞에 가는 개미는, 거친 바람을 가장 먼저 맞느니라. 태보야, 저 개미가 말을 할 줄 안다면, 너무 힘들고 춥다고, 자리를 바꾸고 싶다고 할지도 모르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당부에도 어린 박태보는 맨 앞에 가는 개미만 응원했다.
“이만 들어가자.”
박세당은 아들을 품에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태보야. 너무 서두르면 중요한 것을 놓치느니라. 애비 말 명심하여라. 알겠느냐?”
“예. 아버지.”
해와 달이 떴다 지고 무수한 바람이 동서남북으로 불었다. 꽃들이 피고 지고 몇 번의 함박눈이 마당을 다녀갔다. 박태보는 열 살이 되었고 갈수록 지는 것을 싫어했다. 여름이 깊어 실록이 물결치던 어느 날이었다. 정자에 나란히 앉은 부자는 벌과 나비가 춤추는 정원을 보며 담소를 나누었다.
“허허허. 태보야. 그 비석은 동쪽에 있느니라.”
박세당은 점잖게 아들을 타일렀다.
“아버님. 아닙니다. 충청도 직산에 있는 그 비석은 길 서쪽에 있습니다.”
박태보는 총명한 얼굴로 대답했다.
“허허. 네가 봤느냐? 난 이태 전에 그 앞을 지나왔다.”
그때, 부인이 꽃차를 내왔다. 박세당은 진달래차를 음미하며 미소 지었다. 부인도 웃으며 아들을 만류했다.
“태보야. 호호호. 아버님 말씀이 맞으실 게다. 그만 하여라.”
그러자 열 살 된 박태보가 서상에 바짝 다가앉더니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했다.
“아버님 어머님. 송구하오나 소자 말이 맞습니다. 소자가 일전에 행랑아범과 말 타고 외가에 다녀오다 그 앞을 지나며 봤습니다. 비석은 틀림없이 길 서쪽에 있습니다.”
“허허. 인석 보게나. 애비 말이 맞대도 그러는구나. 그 비석은 동쪽에 있느니라.”
“아버님, 아니옵니다. 서쪽이옵니다. 부디 소자 말 좀 믿어주소서.”
굽히지 않는 아들의 주장에 박세당의 부인이 걱정했다.
“얘가 누굴 닮아 고집이 이리도 세누? 호호호. 그만해라. 아버님 말씀이 옳으실 게야.”
뭔가 떠오른 박태보는 벌떡 일어섰다.
“아버님. 그럼 이 길로 행랑아범을 직산에 보내어 보고 오라 해주십시오.”
박세당과 부인은 깜작 놀랐다.
“지금 행랑아범을 직산으로 보내란 말이냐?”
박태보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이 가장 정확할 듯하옵니다. 행랑아범이 보고 오면 간단히 해결될 것이옵니다.”
부부는 아들의 완강함에 놀라 어리둥절했다. 박세당은 생각했다.
‘이 아이의 고집이 자랄수록 강해지는구나. 큰일이야.’
박세당은 이참에 아들의 고집을 꺾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오냐. 네가 정히 원한다면, 확인해 보자꾸나. 여봐라! 행랑아범 있느냐? 지금 즉시 충청도 직산에 다녀오도록 해라.”
“아버님, 돌쇠도 함께 보내주소서.”
“허허. 행랑아범도 못 믿겠다는 게냐? 네 몸종이 보고 와야 믿겠다고? 좋다. 그럼 둘을 보내보자.”
며칠 후, 직산으로 떠났던 행랑아범과 돌쇠가 돌아왔다.
“영감마님 다녀왔습니다요. 충청도 직산에 있는 그 비석은 동쪽에 있었습니다요.”
박세당이 근엄하게 말했다.
“똑똑히 들었느냐?”
박태보는 인정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몸종인 돌쇠에게 물었다.
“그 비석이 어디에 서 있더냐? 네가 본대로 똑똑히 고하여라.”
돌쇠가 대답했다.
“도련님. 그 비석은 영감마님 말씀대로 동쪽에 있었습니다요. 송구합니다요.”
박세당이 박태보를 엄중히 바라보았다.
“때에 따라선 한걸음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법!”
박태보는 행랑아범이 직산에 다녀온 후에야 고집을 꺾었다. 그의 집요함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초여름이었다.
박태보는 그새 열다섯 소년이 되었다. 박세당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바닥이 온통 날카로운 것으로 찌른 자국이 가득했다.
“여봐라. 이게 어찌된 일이냐?”
“아버님 찾아계시옵니까?”
“이게 다 무엇인지 너 혹시 아느냐?”
“아까 서책을 보는데 방바닥에서 벼룩이 뛰고 있었습니다. 해서 제가 송곳으로 벼룩을 잡다 그만…… 장판에 자국을 내고 말았습니다.”
“뭐, 뭣이라? 송곳으로 벼룩을?”
박세당은 속으로 기가 찼다. 그가 차분히 물었다.
“그래서, 벼룩은 잡았느냐?”
박태보는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었다.
“예. 잡았습니다.”
박세당은 박태보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때 부인 남씨가 부드러운 미소로 불렀다.
“여보, 살구가 아주 잘 익었어요. 태보도 어서 정자로 오너라.”
바람이 시원한 정자에서 온 가족이 주홍빛 살구를 먹었다. 그때 박세당이 알알이 여문 거대한 살구나무를 바라보았다.
“허허허, 작년엔 흉년이더니 올해는 살구가 대풍이로구나. 태보야, 살구 맛이 좋으냐?”
박태보는 단물이 묻은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네 아버지. 달고 맛있습니다.”
박세당은 빙긋 웃으며 아들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엔, 저 살구나무에 살구가 몇 개나 달린 듯 보이느냐?”
부인 남씨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여보, 관두세요. 태보 고집 알면서 당신도 참. 호호호.”
박태보가 몸을 돌려, 주렁주렁 열린 살구나무를 진지하게 살폈다. 살구나무는 가문 대대로 성장해왔기에 거목이었다.
“허허허. 태보야. 그 비석은 동쪽에 있느니라.”
박세당은 점잖게 아들을 타일렀다.
“아버님. 아닙니다. 충청도 직산에 있는 그 비석은 길 서쪽에 있습니다.”
박태보는 총명한 얼굴로 대답했다.
“허허. 네가 봤느냐? 난 이태 전에 그 앞을 지나왔다.”
그때, 부인이 꽃차를 내왔다. 박세당은 진달래차를 음미하며 미소 지었다. 부인도 웃으며 아들을 만류했다.
“태보야. 호호호. 아버님 말씀이 맞으실 게다. 그만 하여라.”
그러자 열 살 된 박태보가 서상에 바짝 다가앉더니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했다.
“아버님 어머님. 송구하오나 소자 말이 맞습니다. 소자가 일전에 행랑아범과 말 타고 외가에 다녀오다 그 앞을 지나며 봤습니다. 비석은 틀림없이 길 서쪽에 있습니다.”
“허허. 인석 보게나. 애비 말이 맞대도 그러는구나. 그 비석은 동쪽에 있느니라.”
“아버님, 아니옵니다. 서쪽이옵니다. 부디 소자 말 좀 믿어주소서.”
굽히지 않는 아들의 주장에 박세당의 부인이 걱정했다.
“얘가 누굴 닮아 고집이 이리도 세누? 호호호. 그만해라. 아버님 말씀이 옳으실 게야.”
뭔가 떠오른 박태보는 벌떡 일어섰다.
“아버님. 그럼 이 길로 행랑아범을 직산에 보내어 보고 오라 해주십시오.”
박세당과 부인은 깜작 놀랐다.
“지금 행랑아범을 직산으로 보내란 말이냐?”
박태보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이 가장 정확할 듯하옵니다. 행랑아범이 보고 오면 간단히 해결될 것이옵니다.”
부부는 아들의 완강함에 놀라 어리둥절했다. 박세당은 생각했다.
‘이 아이의 고집이 자랄수록 강해지는구나. 큰일이야.’
박세당은 이참에 아들의 고집을 꺾어줄 필요성을 느꼈다.
“오냐. 네가 정히 원한다면, 확인해 보자꾸나. 여봐라! 행랑아범 있느냐? 지금 즉시 충청도 직산에 다녀오도록 해라.”
“아버님, 돌쇠도 함께 보내주소서.”
“허허. 행랑아범도 못 믿겠다는 게냐? 네 몸종이 보고 와야 믿겠다고? 좋다. 그럼 둘을 보내보자.”
며칠 후, 직산으로 떠났던 행랑아범과 돌쇠가 돌아왔다.
“영감마님 다녀왔습니다요. 충청도 직산에 있는 그 비석은 동쪽에 있었습니다요.”
박세당이 근엄하게 말했다.
“똑똑히 들었느냐?”
박태보는 인정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몸종인 돌쇠에게 물었다.
“그 비석이 어디에 서 있더냐? 네가 본대로 똑똑히 고하여라.”
돌쇠가 대답했다.
“도련님. 그 비석은 영감마님 말씀대로 동쪽에 있었습니다요. 송구합니다요.”
박세당이 박태보를 엄중히 바라보았다.
“때에 따라선 한걸음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법!”
박태보는 행랑아범이 직산에 다녀온 후에야 고집을 꺾었다. 그의 집요함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초여름이었다.
박태보는 그새 열다섯 소년이 되었다. 박세당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바닥이 온통 날카로운 것으로 찌른 자국이 가득했다.
“여봐라. 이게 어찌된 일이냐?”
“아버님 찾아계시옵니까?”
“이게 다 무엇인지 너 혹시 아느냐?”
“아까 서책을 보는데 방바닥에서 벼룩이 뛰고 있었습니다. 해서 제가 송곳으로 벼룩을 잡다 그만…… 장판에 자국을 내고 말았습니다.”
“뭐, 뭣이라? 송곳으로 벼룩을?”
박세당은 속으로 기가 찼다. 그가 차분히 물었다.
“그래서, 벼룩은 잡았느냐?”
박태보는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었다.
“예. 잡았습니다.”
박세당은 박태보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때 부인 남씨가 부드러운 미소로 불렀다.
“여보, 살구가 아주 잘 익었어요. 태보도 어서 정자로 오너라.”
바람이 시원한 정자에서 온 가족이 주홍빛 살구를 먹었다. 그때 박세당이 알알이 여문 거대한 살구나무를 바라보았다.
“허허허, 작년엔 흉년이더니 올해는 살구가 대풍이로구나. 태보야, 살구 맛이 좋으냐?”
박태보는 단물이 묻은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네 아버지. 달고 맛있습니다.”
박세당은 빙긋 웃으며 아들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엔, 저 살구나무에 살구가 몇 개나 달린 듯 보이느냐?”
부인 남씨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여보, 관두세요. 태보 고집 알면서 당신도 참. 호호호.”
박태보가 몸을 돌려, 주렁주렁 열린 살구나무를 진지하게 살폈다. 살구나무는 가문 대대로 성장해왔기에 거목이었다.
“아버지. 제가 보기에는 한…… 천 이백 개는 족히 될 것으로 보입니다.”
“예끼! 아무리 살구나무가 크기로서니 천 개가 달리겠느냐? 애비가 보기엔 한 팔백여개 정도는 되겠구나. 허허허.”
눈빛이 진지해진 박태보가 대답했다.
“아버지. 작년에 흉년이었을 때도 육백 개가 훨씬 넘었사옵니다. 올해는 살구가 풍년 아니옵니까? 보세요. 나무가 무거워 찢어진 곳도 있사옵니다. 그러니 족히 천 개는 될 것이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또 팽팽히 맞섰다. 박세당의 부인이 중재하고 나섰다.
“오늘 해가 져도 논쟁이 끝날 것 같지 않네요. 살구를 얼른 따서 수를 세어보고 실랑이를 멈추는 게 빠르겠어요.”
행랑아범과 돌쇠가 급히 사다리를 가져왔다. 행랑어멈과 여종들이 나무 아래 널찍이 멍석을 깔았다. 행랑아범과 돌쇠가 손에 침을 퉤 뱉었다. 그러더니 장대를 들고 조심조심 나무로 올라가 살구를 털어 그 수를 세기 시작했다. 박세당과 아들 태보는 진지하게 기다렸다. 살구를 헤아리는 일은,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질 때서야 겨우 끝났다.
“영감마님. 살구는 모두 팔백열아홉 개 이옵니다요.”
박세당이 통쾌하게 웃었다.
“허허허. 태보야 들었느냐? 내가 맞혔다. 그러게 그리 억지로 아는 체하고 이기려드는 것이 아니다. 다음부터는 좀 자중하여라. 알겠느냐?”
박태보는 살구나무를 신중히 보더니 결심한 듯 직접 올라갔다. 박태보는 벌레 먹은 살구와 풋살구를 넉넉히 따서 아버지 앞에 보였다.
“아버지. 행랑아범과 돌쇠가 장대로 턴 살구는 잘 익은 것들이 떨어진 것입니다. 벌레 먹었거나 아직 덜 익은 살구는 나뭇잎 뒤에 그대로 있습니다. 보소서. 이것도 분명 살구 아니옵니까? 그러니 제가 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사옵니까?”
소년이 된 박태보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늘 증명해 보이려 했다. 박세당이 웃음기 걷힌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는 대체, 굽히고 물러설 줄 모르는 것일까? 큰일이로고. 지금이야 부모가 애정으로 감싸줄 수 있겠지만……. 장성하여 나랏일을 할 때는 어찌될 것인가? 저 아이의 성정은 자신에게 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야……. 장차 이 일을 어쩐다?’
생각을 멈춘 박세당이 인자하게 아들을 보았다.
“애비랑 잠시 서책이나 보자꾸나.”
“예.”
박세당은 태보를 안채로 데리고 들어갔다.
“태보야, 고사에 범씨 아들의 일화를 아느냐?”
“모르옵니다.”
“범순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느니라. 그는 북송의 명재상 범중엄의 둘째 아들이다. 범순인의 자는 요부(堯夫)니라.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 요부에게 고향인 고소로 가서 보리 500석을 가져오라고 했느니라. 요부가 보리를 배에 싣고 돌아오던 길에 단양에서 친구 석만경을 만났다. 석만경은 몇 년 사이에 부모와 아내를 잃고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친구의 사정을 안 요부는, 보리 500석을 장례비로 쓰라고 배 째로 석만경에게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요부가 아버지께 석만경의 어려운 처지를 전했다. 그러자 범중엄은 “그럼, 왜 보리를 주지 않았느냐”며 아들을 나무랐다. 그랬더니 요부가 “벌써 배 째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태보야, 너는 범순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진지하게 듣던 박태보가 대답했다.
“너그러운 마음씨와 사람을 아끼는 배려심이 잘 느껴지옵니다.”
“맞다. 범순인은 후에 재상이 되었느니라. 그의 충직함에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태보야.”
“말씀하오소서.”
“이변이 없는 한, 너는 곧 관직에 나서게 될 것이다. 오늘 아비가 네게 지어주는 이 시를 네 뼈에 새기 거라.”
“예끼! 아무리 살구나무가 크기로서니 천 개가 달리겠느냐? 애비가 보기엔 한 팔백여개 정도는 되겠구나. 허허허.”
눈빛이 진지해진 박태보가 대답했다.
“아버지. 작년에 흉년이었을 때도 육백 개가 훨씬 넘었사옵니다. 올해는 살구가 풍년 아니옵니까? 보세요. 나무가 무거워 찢어진 곳도 있사옵니다. 그러니 족히 천 개는 될 것이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또 팽팽히 맞섰다. 박세당의 부인이 중재하고 나섰다.
“오늘 해가 져도 논쟁이 끝날 것 같지 않네요. 살구를 얼른 따서 수를 세어보고 실랑이를 멈추는 게 빠르겠어요.”
행랑아범과 돌쇠가 급히 사다리를 가져왔다. 행랑어멈과 여종들이 나무 아래 널찍이 멍석을 깔았다. 행랑아범과 돌쇠가 손에 침을 퉤 뱉었다. 그러더니 장대를 들고 조심조심 나무로 올라가 살구를 털어 그 수를 세기 시작했다. 박세당과 아들 태보는 진지하게 기다렸다. 살구를 헤아리는 일은,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질 때서야 겨우 끝났다.
“영감마님. 살구는 모두 팔백열아홉 개 이옵니다요.”
박세당이 통쾌하게 웃었다.
“허허허. 태보야 들었느냐? 내가 맞혔다. 그러게 그리 억지로 아는 체하고 이기려드는 것이 아니다. 다음부터는 좀 자중하여라. 알겠느냐?”
박태보는 살구나무를 신중히 보더니 결심한 듯 직접 올라갔다. 박태보는 벌레 먹은 살구와 풋살구를 넉넉히 따서 아버지 앞에 보였다.
“아버지. 행랑아범과 돌쇠가 장대로 턴 살구는 잘 익은 것들이 떨어진 것입니다. 벌레 먹었거나 아직 덜 익은 살구는 나뭇잎 뒤에 그대로 있습니다. 보소서. 이것도 분명 살구 아니옵니까? 그러니 제가 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사옵니까?”
소년이 된 박태보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늘 증명해 보이려 했다. 박세당이 웃음기 걷힌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는 대체, 굽히고 물러설 줄 모르는 것일까? 큰일이로고. 지금이야 부모가 애정으로 감싸줄 수 있겠지만……. 장성하여 나랏일을 할 때는 어찌될 것인가? 저 아이의 성정은 자신에게 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야……. 장차 이 일을 어쩐다?’
생각을 멈춘 박세당이 인자하게 아들을 보았다.
“애비랑 잠시 서책이나 보자꾸나.”
“예.”
박세당은 태보를 안채로 데리고 들어갔다.
“태보야, 고사에 범씨 아들의 일화를 아느냐?”
“모르옵니다.”
“범순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느니라. 그는 북송의 명재상 범중엄의 둘째 아들이다. 범순인의 자는 요부(堯夫)니라.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 요부에게 고향인 고소로 가서 보리 500석을 가져오라고 했느니라. 요부가 보리를 배에 싣고 돌아오던 길에 단양에서 친구 석만경을 만났다. 석만경은 몇 년 사이에 부모와 아내를 잃고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친구의 사정을 안 요부는, 보리 500석을 장례비로 쓰라고 배 째로 석만경에게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요부가 아버지께 석만경의 어려운 처지를 전했다. 그러자 범중엄은 “그럼, 왜 보리를 주지 않았느냐”며 아들을 나무랐다. 그랬더니 요부가 “벌써 배 째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태보야, 너는 범순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진지하게 듣던 박태보가 대답했다.
“너그러운 마음씨와 사람을 아끼는 배려심이 잘 느껴지옵니다.”
“맞다. 범순인은 후에 재상이 되었느니라. 그의 충직함에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태보야.”
“말씀하오소서.”
“이변이 없는 한, 너는 곧 관직에 나서게 될 것이다. 오늘 아비가 네게 지어주는 이 시를 네 뼈에 새기 거라.”
한 걸음 갈 적에 한 걸음 천천히 감을 잊지 마라 / 一步無忘一步遲
더디 감은 안온하고 빨리 감은 위태로운 법 / 遲行安穩疾行危
일찍이 머뭇거리며 사람들의 뒤에 처져서 갔으니 / 逡巡曾落人叢後
범씨의 아들이 바로 너의 스승이니라 / 范氏之兒是汝師
박태보에게 천천히 갈 것을 당부한 시였다. 박세당은 자신의 둘째 아들 박태보의 재주가 덕을 뛰어넘지 않기를 바랐다.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보다 너그러운 마음씨로 세상을 살아가길 바랐다.
그 후 박태보는 1675년 숙종1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1677년에는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형님보다도 먼저 장원급제를 했다. 박태보는 날이 갈수록 젊은 관리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의 선함이 알려져 장안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총기와 재주를 겸비한 아들이 박세당은 늘 염려되었다. 남인과 서인들의 정권다툼은 갈수록 심했다. 박세당은 정치에서 마음이 떠났다. 그에게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다 부질없었다. 그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서계의 골짜기로 떠나 자연인으로 살았다. 고요한 날들을 보내니 박세당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제 막 관로의 삶을 시작한 아들의 안위가 늘 걱정이었다.
그 후 박태보는 1675년 숙종1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1677년에는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형님보다도 먼저 장원급제를 했다. 박태보는 날이 갈수록 젊은 관리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의 선함이 알려져 장안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총기와 재주를 겸비한 아들이 박세당은 늘 염려되었다. 남인과 서인들의 정권다툼은 갈수록 심했다. 박세당은 정치에서 마음이 떠났다. 그에게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다 부질없었다. 그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서계의 골짜기로 떠나 자연인으로 살았다. 고요한 날들을 보내니 박세당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제 막 관로의 삶을 시작한 아들의 안위가 늘 걱정이었다.
박태보는 노론과 소론이 다툴 때마다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으로 시비를 투명하게 가렸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박태보는 남인과 서인이 반목하는 정국 속에서 점점 세력의 중심부로 들어섰다. 탄탄대로였던 앞길은 막히기 시작했고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박태보의 운명이 벼랑으로 치달은 것은 1689년이었다. 그해 기사환국사건이 터졌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혼인한 후 8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었다. 그러던 중 후궁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석 달 만에 장씨의 아들을 적장자로 선언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았다. 대신들 사이에서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4월 25일에는 86명이 연명으로 반대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읽은 숙종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숙종의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그가 어좌(御座)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나를 당장 폐위시키라!”
크게 노한 숙종이 대신들을 향해 외쳤다.
“지금 당장! 상소올린 자들을 불러들여라! 삼경(三更) 전에 인정문 앞에 형구를 준비하라.”
“전하, 한밤중이라 준비가 불가능하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내 직접 국문하겠다.”
늦은 밤에 상소와 관련된 신하들이 모두 붙잡혀왔다. 숙종이 야심한 시각에 국문장으로 향했다. 상소에는 대표자로 오두인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박태보는 오두인에게 자신이 작성했다 하라고 당부했다. 가장 먼저 심문을 받은 오두인이 박태보가 대표로 집필했다고 하자 박태보가 끌려 나왔다. 노여움을 품은 숙종이 박태보에게 물었다.
“오두인의 말이 사실이냐?”
박태보는 모두 사실이라고 답했다. 숙종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눈에서 용암처럼 분노가 끓어올랐다.
“당장! 저 악독한 놈의 머리를 베라!”
격노한 숙종의 음성이 궁궐의 어둠을 갈랐다. 박태보의 죽음을 막기 위해 신하들이 나서서 간청했다.
“전하, 부디 고정하오소서. 박태보가 젊은 치기에 저지른 잘못으로 사료되옵니다. 순간의 실수일진데, 참수를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조정대신들의 간곡한 요청에 숙종이 분노를 누르며 명했다.
“저자를 매우 쳐라!”
형틀에 묶인 박태보가 신음을 삼키며 장을 맞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신하로서 올바로 왕을 섬기다 죽는 것이라면…… 이 또한 충심(忠心) 아니겠는가…….’
박태보는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왕에게 빌지 않았다. 자신은 대의(大義)를 따른 것뿐이라고 호소했다. 박태보의 호소는 숙종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저놈을 매우 쳐라! 매우 치란 말이다!”
장을 맞은 박태보의 몸은 살점이 너덜거렸다. 박태보는 혼미한 정신에도 간절히 말했다.
“소인들이 전하께 무슨 무함을 했나이까? 전하! 어찌하여 이런 망국적인 일을 하십니까?”
그의 무릎 위에 무거운 바윗돌이 얹어졌다. 무릎 밑에 깔린 사기조각들이 살과 뼛속을 파고들었다. 밤새, 몸은 뜨거운 인두에 지져졌다. 박태보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상소문의 정당성을 끝까지 외쳤다. 격노한 숙종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저 놈을 더 세게 쳐라! 어서!”
어느새 미명이 걷히고 날이 밝아왔다.
“전하, 날이 밝았사옵니다. 부디 고정하오소서.”
대신들이 만류했지만 숙종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박태보는 진도로 유배지가 정해졌다.
“그럼! 나를 당장 폐위시키라!”
크게 노한 숙종이 대신들을 향해 외쳤다.
“지금 당장! 상소올린 자들을 불러들여라! 삼경(三更) 전에 인정문 앞에 형구를 준비하라.”
“전하, 한밤중이라 준비가 불가능하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내 직접 국문하겠다.”
늦은 밤에 상소와 관련된 신하들이 모두 붙잡혀왔다. 숙종이 야심한 시각에 국문장으로 향했다. 상소에는 대표자로 오두인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박태보는 오두인에게 자신이 작성했다 하라고 당부했다. 가장 먼저 심문을 받은 오두인이 박태보가 대표로 집필했다고 하자 박태보가 끌려 나왔다. 노여움을 품은 숙종이 박태보에게 물었다.
“오두인의 말이 사실이냐?”
박태보는 모두 사실이라고 답했다. 숙종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눈에서 용암처럼 분노가 끓어올랐다.
“당장! 저 악독한 놈의 머리를 베라!”
격노한 숙종의 음성이 궁궐의 어둠을 갈랐다. 박태보의 죽음을 막기 위해 신하들이 나서서 간청했다.
“전하, 부디 고정하오소서. 박태보가 젊은 치기에 저지른 잘못으로 사료되옵니다. 순간의 실수일진데, 참수를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조정대신들의 간곡한 요청에 숙종이 분노를 누르며 명했다.
“저자를 매우 쳐라!”
형틀에 묶인 박태보가 신음을 삼키며 장을 맞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신하로서 올바로 왕을 섬기다 죽는 것이라면…… 이 또한 충심(忠心) 아니겠는가…….’
박태보는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왕에게 빌지 않았다. 자신은 대의(大義)를 따른 것뿐이라고 호소했다. 박태보의 호소는 숙종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저놈을 매우 쳐라! 매우 치란 말이다!”
장을 맞은 박태보의 몸은 살점이 너덜거렸다. 박태보는 혼미한 정신에도 간절히 말했다.
“소인들이 전하께 무슨 무함을 했나이까? 전하! 어찌하여 이런 망국적인 일을 하십니까?”
그의 무릎 위에 무거운 바윗돌이 얹어졌다. 무릎 밑에 깔린 사기조각들이 살과 뼛속을 파고들었다. 밤새, 몸은 뜨거운 인두에 지져졌다. 박태보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상소문의 정당성을 끝까지 외쳤다. 격노한 숙종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저 놈을 더 세게 쳐라! 어서!”
어느새 미명이 걷히고 날이 밝아왔다.
“전하, 날이 밝았사옵니다. 부디 고정하오소서.”
대신들이 만류했지만 숙종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박태보는 진도로 유배지가 정해졌다.
4월 26일이었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박태보가 의금부 감옥에서 비틀비틀 끌려나왔다.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이 가슴 아파 울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박태보는 귀양길에 명례방(명동) 집에 잠시 들렀다. 중요한 책을 꾸리고 가마를 타고 남대문을 나섰다. 해는 이미 기울어 노을이 졌다. 남다른 기개로 의로움을 따랐다가 화를 입은 박태보가 쓸쓸히 귀양길에 올랐다.
“아이고. 나리. 이게 대체 뭔 일입니까요? 쯧쯧쯧, 하늘도 무심하시지.”
“여보게. 내가 그 가마를 들겠소.”
박태보의 모습에 가슴 치던 천민과 노인들까지 자진해 가마를 들었다. 박태보는 간신히 강을 건너 노량으로 갔다. 그의 몸은 이미 죽음을 앞에 둔 상태였다.
“잠시 멈추시오! 상태가 위중하오!”
박태보의 상태가 나아지길 기다리며 노량에서 며칠을 보냈다. 뱍태보를 실은 가마가 멈춘 곳은 사육신의 사당 아래였다. 목숨 걸고 절의를 지킨 사람의 종착지로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날은 5월 5일 아침이었다. 아들이 위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박세당이 달려왔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박태보가 의금부 감옥에서 비틀비틀 끌려나왔다.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이 가슴 아파 울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박태보는 귀양길에 명례방(명동) 집에 잠시 들렀다. 중요한 책을 꾸리고 가마를 타고 남대문을 나섰다. 해는 이미 기울어 노을이 졌다. 남다른 기개로 의로움을 따랐다가 화를 입은 박태보가 쓸쓸히 귀양길에 올랐다.
“아이고. 나리. 이게 대체 뭔 일입니까요? 쯧쯧쯧, 하늘도 무심하시지.”
“여보게. 내가 그 가마를 들겠소.”
박태보의 모습에 가슴 치던 천민과 노인들까지 자진해 가마를 들었다. 박태보는 간신히 강을 건너 노량으로 갔다. 그의 몸은 이미 죽음을 앞에 둔 상태였다.
“잠시 멈추시오! 상태가 위중하오!”
박태보의 상태가 나아지길 기다리며 노량에서 며칠을 보냈다. 뱍태보를 실은 가마가 멈춘 곳은 사육신의 사당 아래였다. 목숨 걸고 절의를 지킨 사람의 종착지로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날은 5월 5일 아침이었다. 아들이 위중하다는 소문을 듣고 박세당이 달려왔다.
“태보야…… 아비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박세당이 죽어가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온몸이 찢기고 부러져 만신창이가 된 아들이 실신해 누워있었다. 더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가여운 아들. 박세당은 서서히 죽어가는 아들을 품에 안고 짐승처럼 울었다.
“이놈아. 흐흐흑! 내 뼈와 살이, 돌절구에 가루가 된들 오늘보다 아프겠느냐. 흐흐흐…… 어찌…… 어찌…… 이 늙은 아비보다, 청솔 같은 네가 먼저 가려하느냐. 어찌! 흐흐흑……!”
박태보는 의식이 흐릿해져가는 눈으로 간신히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아…… 버지, 소인 이만, 먼저…… 가, 가겠습니다. 생과사의 순서를 거스른 이 불효자를 부디…… 용서 하소서…….”
이번 생에서 아들의 명운이 다했음을 박세당도 알았다.
“그래, 이제…… 조용히 가거라. 흐흐흑……! 내 곧…… 너를 뒤따라 갈 것이니…… 한 많은 이 세상 미련 두지 말고, 훨훨 떠나거라.”
박세당은 자신보다 먼저 떠나는 가여운 아들을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차마 아들의 최후를 볼 수 없어, 울며 돌아섰다. 박세당이 저만치 돌아서자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나뉘듯,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찬바람이 휙, 가르며 지나갔다. 혹시 아버지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때, 실오라기처럼 간당간당 버텨왔던 박태보의 숨이 툭, 끊어졌다. 결국 박태보의 아버지 박세당의 염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는 두 자식을 모두 앞세운 슬픔의 아버지였다. 그 후 박세당은 다양한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했다. 그는 자식들이 생전에 쓴 책들을 묶고 정리하며 초야에 묻혀 살았다. 박세당은 자식의 장점을 자랑하기보다 그 위험을 걱정했던 아버지였다.
박세당은 부인과 함께, 하늘로 갈 날을 기다리며 초막에서 숨어 살았다. 백발이 된 그는 밤마다 꿈을 꾸었다. 그의 꿈속에서는 언제나 어린 기러기 두 마리가 어딘가로 날아가며 구슬피 울었다. 꿈에서 박세당은 날아가는 기러기 형제를 향해 울며 손을 흔들었다.
“태유야…… 태보야…… 애비 여기 있다. 찬이슬도 쉬어가는 이 추운 밤……, 너희 둘은 어디를 그리 바삐 가느냐. 천천히 가거라…….”
1703년, 박세당은 그토록 보고팠던 두 아들이 있는 하늘로 떠났다.
박세당이 죽어가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온몸이 찢기고 부러져 만신창이가 된 아들이 실신해 누워있었다. 더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가여운 아들. 박세당은 서서히 죽어가는 아들을 품에 안고 짐승처럼 울었다.
“이놈아. 흐흐흑! 내 뼈와 살이, 돌절구에 가루가 된들 오늘보다 아프겠느냐. 흐흐흐…… 어찌…… 어찌…… 이 늙은 아비보다, 청솔 같은 네가 먼저 가려하느냐. 어찌! 흐흐흑……!”
박태보는 의식이 흐릿해져가는 눈으로 간신히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아…… 버지, 소인 이만, 먼저…… 가, 가겠습니다. 생과사의 순서를 거스른 이 불효자를 부디…… 용서 하소서…….”
이번 생에서 아들의 명운이 다했음을 박세당도 알았다.
“그래, 이제…… 조용히 가거라. 흐흐흑……! 내 곧…… 너를 뒤따라 갈 것이니…… 한 많은 이 세상 미련 두지 말고, 훨훨 떠나거라.”
박세당은 자신보다 먼저 떠나는 가여운 아들을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차마 아들의 최후를 볼 수 없어, 울며 돌아섰다. 박세당이 저만치 돌아서자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나뉘듯,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찬바람이 휙, 가르며 지나갔다. 혹시 아버지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때, 실오라기처럼 간당간당 버텨왔던 박태보의 숨이 툭, 끊어졌다. 결국 박태보의 아버지 박세당의 염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는 두 자식을 모두 앞세운 슬픔의 아버지였다. 그 후 박세당은 다양한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했다. 그는 자식들이 생전에 쓴 책들을 묶고 정리하며 초야에 묻혀 살았다. 박세당은 자식의 장점을 자랑하기보다 그 위험을 걱정했던 아버지였다.
박세당은 부인과 함께, 하늘로 갈 날을 기다리며 초막에서 숨어 살았다. 백발이 된 그는 밤마다 꿈을 꾸었다. 그의 꿈속에서는 언제나 어린 기러기 두 마리가 어딘가로 날아가며 구슬피 울었다. 꿈에서 박세당은 날아가는 기러기 형제를 향해 울며 손을 흔들었다.
“태유야…… 태보야…… 애비 여기 있다. 찬이슬도 쉬어가는 이 추운 밤……, 너희 둘은 어디를 그리 바삐 가느냐. 천천히 가거라…….”
1703년, 박세당은 그토록 보고팠던 두 아들이 있는 하늘로 떠났다.
스토리원고 | | | 김명희 소설가 |
연구원고 | | | 김보름 교수 |
일러스트 | | | 컬처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