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_자식잃은 슬픔으로 지은 의학서 -마과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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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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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잃은 슬픔으로 지은 의학서 –마과회통-
농아야 농아야
서기 1802년 겨울, 정약용은 유배지인 강진 토담집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4살짜리 막내아들이 마마(천연두)로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농아가 죽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귀양살이 떠날 때 과천 주막집에까지 제 엄마랑 따라와서 재롱을 부리던 아이였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다니.
정약용은 무심한 세월을 한탄했다. 이제 겨우 귀양살이에 익숙해지려는데 또 느닷없는 불행이 들이닥친 것이다. 정약용은 토담집 마당 한편에 우두커니 서서 마른 대추나무 가지 하나를 툭 분질렀다.
지난 신유년(1801년) 한 해는 너무도 길고 혹독했다. 초봄부터 감옥에 갇혀 국문을 받았고, 경상도 장기(포항지역의 옛 지명)로 귀양을 갔다. 그러다가 10월에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고, 거기에서 귀양지가 바뀌어 멀고 먼 전라도 바닷가 강진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 외진 주막집에 방 한 칸을 얻어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한양에서 장기까지 800여리, 장기에서 한양까지 다시 800여리. 또 한양에서 강진까지 800여리. 도합 2400여리를 걸어서 이동했으니…….
“나리. 미음이라도 좀 드시지요?”
늙은 주막집 노파가 정약용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정약용의 슬픈 눈빛은 멍하니 마른하늘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역적 죄인으로 몰려 귀양 온 그에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주막집 노파만은 그를 먹여주고 재워주며 돌봐 주었다. 주막집은 몹시 비좁은 토담집이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불편을 견디며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차에 비통한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그날 밤, 정약용은 노파가 건네준 약주를 한 대접 얻어 마시고 호롱 심지를 돋우었다. 고향의 장성한 두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우리 농아가 죽었다니 비참하구나! 가련한 아이. 나의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을 때 이런 일까지 닥치다니. 정말 마음을 크게 먹을 수가 없구나…….’
참고 참았던 눈물이 종이 위로 떨어져 동그랗게 번져갔다. 정약용은 기침을 한번 크게 내뱉고는 다시 붓을 힘주어 잡았다.
‘……내가 이렇듯 먼 바닷가에 앉아 있은 지가 무척 오래인데 너마저 죽다니! 그 애의 죽음이 한결 서럽고 슬프구나. 생사고락의 이치를 조금 깨달았다는 나의 슬픔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네 어머니야…….’
정약용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어 고개를 들고 붓을 내려놓았다. 먼 바다를 건너온 겨울 밤바람이 토담집 지붕을 휩쓸고 지나갔다. 몇 해 전, 밤마다 시간을 내어 의학서 ‘마과회통’을 쓰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정약용은 잠시 허리를 곧추세우고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아니, 이럴 수가. 농아가 죽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귀양살이 떠날 때 과천 주막집에까지 제 엄마랑 따라와서 재롱을 부리던 아이였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다니.
정약용은 무심한 세월을 한탄했다. 이제 겨우 귀양살이에 익숙해지려는데 또 느닷없는 불행이 들이닥친 것이다. 정약용은 토담집 마당 한편에 우두커니 서서 마른 대추나무 가지 하나를 툭 분질렀다.
지난 신유년(1801년) 한 해는 너무도 길고 혹독했다. 초봄부터 감옥에 갇혀 국문을 받았고, 경상도 장기(포항지역의 옛 지명)로 귀양을 갔다. 그러다가 10월에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고, 거기에서 귀양지가 바뀌어 멀고 먼 전라도 바닷가 강진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 외진 주막집에 방 한 칸을 얻어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한양에서 장기까지 800여리, 장기에서 한양까지 다시 800여리. 또 한양에서 강진까지 800여리. 도합 2400여리를 걸어서 이동했으니…….
“나리. 미음이라도 좀 드시지요?”
늙은 주막집 노파가 정약용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정약용의 슬픈 눈빛은 멍하니 마른하늘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역적 죄인으로 몰려 귀양 온 그에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주막집 노파만은 그를 먹여주고 재워주며 돌봐 주었다. 주막집은 몹시 비좁은 토담집이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불편을 견디며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차에 비통한 소식을 접했던 것이다.
그날 밤, 정약용은 노파가 건네준 약주를 한 대접 얻어 마시고 호롱 심지를 돋우었다. 고향의 장성한 두 아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우리 농아가 죽었다니 비참하구나! 가련한 아이. 나의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을 때 이런 일까지 닥치다니. 정말 마음을 크게 먹을 수가 없구나…….’
참고 참았던 눈물이 종이 위로 떨어져 동그랗게 번져갔다. 정약용은 기침을 한번 크게 내뱉고는 다시 붓을 힘주어 잡았다.
‘……내가 이렇듯 먼 바닷가에 앉아 있은 지가 무척 오래인데 너마저 죽다니! 그 애의 죽음이 한결 서럽고 슬프구나. 생사고락의 이치를 조금 깨달았다는 나의 슬픔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네 어머니야…….’
정약용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어 고개를 들고 붓을 내려놓았다. 먼 바다를 건너온 겨울 밤바람이 토담집 지붕을 휩쓸고 지나갔다. 몇 해 전, 밤마다 시간을 내어 의학서 ‘마과회통’을 쓰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정약용은 잠시 허리를 곧추세우고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마과회통
약 5년 전인 1797년 여름,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의 고을 원님으로 발령받았다. 곡산 도호부사였다. 고을 수령으로 근무하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의학서 ‘마과회통’을 저작한 일이었다.
자신이 다스리는 고을에 유행병(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본 정약용은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젖먹이 갓난아기나 한창 재롱부릴 나이의 어린이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서, 지난 날 자신의 어린 자식들이 유행병으로 죽어나가던 때를 떠올렸다. 정약용은 4년 전과 7년 전에 어린 딸과 어린 아들을 천연두와 홍역이라는 유행병으로 잃은 적이 있었다.
낮에는 고을을 다스리는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중국 의학서와 조선 의학서를 종합하여 철저한 연구를 하고, 자신의 경험과 연구를 보태어 새로운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작했다. 마과회통이란, 마과(麻科) 즉 마진(痲疹, 홍역) 계통의 병과 그 치료법을 모두 모아(會) 잘 통(通)하도록 정리했다는 뜻이었다.
정약용은 당시 백성들이 유행병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천연두와 홍역을 조선시대 사람들은 마마(媽媽)라고 불렀다. 마마는 원래 상감마마, 중전마마, 동궁마마와 같이 임금이나 그 가족을 높여 부르는 존칭어였다. 천연두와 홍역의 피해가 워낙 크고 무서웠기 때문에 이 두 질병을 일러 ‘마마’라고 높여 불렀던 것이다. 천연두와 홍역의 치사율은 30%에 달했다. 어린이의 사망률은 더욱 높았다.
낮에는 고을을 다스리는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밤이면 책상 앞에 앉아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중국 의학서와 조선 의학서를 종합하여 철저한 연구를 하고, 자신의 경험과 연구를 보태어 새로운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작했다. 마과회통이란, 마과(麻科) 즉 마진(痲疹, 홍역) 계통의 병과 그 치료법을 모두 모아(會) 잘 통(通)하도록 정리했다는 뜻이었다.
정약용은 당시 백성들이 유행병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천연두와 홍역을 조선시대 사람들은 마마(媽媽)라고 불렀다. 마마는 원래 상감마마, 중전마마, 동궁마마와 같이 임금이나 그 가족을 높여 부르는 존칭어였다. 천연두와 홍역의 피해가 워낙 크고 무서웠기 때문에 이 두 질병을 일러 ‘마마’라고 높여 불렀던 것이다. 천연두와 홍역의 치사율은 30%에 달했다. 어린이의 사망률은 더욱 높았다.
“내 이 두 질병을 꼭 잡고야 말겠다!”
정약용은 밤을 새우며 촛불을 밝히고 서적들을 들추어가며 연구를 했다. 두창(痘瘡, 천연두)과 마진(痲疹, 홍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신라의 선덕왕과 문선왕이 천연두에 걸려 승하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천연두와 홍역에 관한 기록이 여럿 있었다.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종)이 홍역에 걸려 14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기록도 보였다.
‘성녕대군 이종이 졸하였다. ……창진(瘡疹, 홍역)에 걸려서 병이 심해지니, 신(神)에게 제사 지내지 아니함이 없었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졸하게 되니 나이 14세였다.’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이임)이 19세의 나이에 천연두로 죽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평원대군 이임이 졸하였다. ……두창(痘瘡, 천연두)을 앓다가 돌아가니 나이 19세였다.’
정약용은 불과 11년 전에 있었던 홍역의 대유행을 떠올렸다. 1786년, 정약용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다. 한창 공부하던 때였다. 그때 전국적으로 홍역이 크게 유행했다. 재위 10년째의 정조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선왕들이 해왔던 것처럼 서울과 지방에서 제사를 지내 백성들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했다. 그리고 왕실 의료 전담관청인 전의감(典醫監)과 백성들을 치료하는 혜민서(惠民署)에 약을 처방하도록 했다. 또한 한성부에서도 약을 지급하고 병을 진찰하게 했다. 담당 관청인 의사(醫司)에서는 홍역 치료를 위한 절목(節目, 치료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홍역으로 희생된 백성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도 그때 4살의 어린 나이로 희생됐다.
‘왕세자의 병세가 갈수록 심해지자 시약청을 설치했다. 그리고 대신을 파견하여 재차 사직과 종묘에 기도했다. 이날 미시(未時,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에 창덕궁의 별당에서 훙서(薨逝, 귀인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했다.’
정조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정약용의 책임감은 더욱 막중했다. 백성뿐만 아니라 이 나라 왕실을 위해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유행병은 잡아야했다. 자신의 희생된 어린 자식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정약용 자신 또한 2살 때 두창(천연두)을 앓았다. 다행이 가볍게 지나가 흔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른쪽 눈썹 위에 조그만 흉터가 남아 있어 눈썹이 세 개로 나뉘게 되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호를 스스로 지었다. 삼미자(三眉子, 눈썹이 세 개인 사람). 그리고 7살 때부터 짓기 시작한 시를 모아 10살 무렵에는 ‘삼미자집’이란 책을 내기도 했었다.
정약용은 마진(홍역)도 앓았다. 그때 그를 구해준 이는 이헌길이라는 의원이었다. 이헌길은 마진에 대해 독자적인 연구를 펼쳐 치료서인 ‘마진기방’이란 의학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살린 아이들이 거의 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정약용 또한 그의 의술 덕분에 살아났다.
정약용은 마과회통을 쓰면서 이헌길의 마진기방이란 책을 참고했다. 그의 책을 읽으며 근원을 찾고 근본을 탐구한 다음, 중국의 여러 책들을 살폈다. 홍역은 전염이 매우 빠르고 고열이 심하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병이었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이 책을 펴면 찾기 편하고 처방을 구하기 쉽게 했다. 무려 다섯 번의 수정을 거친 뒤에야 책이 완성되었다.
정약용은 책을 다 쓰고 흡족한 마음으로 서문을 지었다.
‘……병든 사람에게 의원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모든 병이 다 그렇지만 홍역이 더욱 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의원의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홍역은 몇 년 단위로 한 번씩 발생하는 것이니, 이 홍역 치료를 업으로 삼으면 기대할 만한 이익이 없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또한 환자를 만나서는 치료하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간혹 억측으로 약을 써서 사람을 오히려 일찍 죽게 만드니 정말 잔인한 일이다. ……만약 적의 침입을 예견하여 미리 무기를 손질하고 성곽을 보수해 두면 이기지 못할 전쟁이 없듯이…….’
정약용은 자신의 자식들도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또한 많은 백성들이 홍역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홍역에 관한 종합 치료술을 담은 책을 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인 1798년 9월과 10월, 정약용의 일곱 번째 아들 삼동(三童)이와 막 태어난 여덟 번째 갓난아이가 한 달 사이에 죽어나갔다. 전염병 때문이었다. 그리고 넉 달 뒤에 막내아들 농아가 잉태되어 1799년 12월 2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 아이 역시 3년을 살다가 1802년 11월 30일에 죽은 것이다.
정약용은 밤을 새우며 촛불을 밝히고 서적들을 들추어가며 연구를 했다. 두창(痘瘡, 천연두)과 마진(痲疹, 홍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신라의 선덕왕과 문선왕이 천연두에 걸려 승하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천연두와 홍역에 관한 기록이 여럿 있었다.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종)이 홍역에 걸려 14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기록도 보였다.
‘성녕대군 이종이 졸하였다. ……창진(瘡疹, 홍역)에 걸려서 병이 심해지니, 신(神)에게 제사 지내지 아니함이 없었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졸하게 되니 나이 14세였다.’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이임)이 19세의 나이에 천연두로 죽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평원대군 이임이 졸하였다. ……두창(痘瘡, 천연두)을 앓다가 돌아가니 나이 19세였다.’
정약용은 불과 11년 전에 있었던 홍역의 대유행을 떠올렸다. 1786년, 정약용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다. 한창 공부하던 때였다. 그때 전국적으로 홍역이 크게 유행했다. 재위 10년째의 정조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선왕들이 해왔던 것처럼 서울과 지방에서 제사를 지내 백성들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했다. 그리고 왕실 의료 전담관청인 전의감(典醫監)과 백성들을 치료하는 혜민서(惠民署)에 약을 처방하도록 했다. 또한 한성부에서도 약을 지급하고 병을 진찰하게 했다. 담당 관청인 의사(醫司)에서는 홍역 치료를 위한 절목(節目, 치료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홍역으로 희생된 백성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도 그때 4살의 어린 나이로 희생됐다.
‘왕세자의 병세가 갈수록 심해지자 시약청을 설치했다. 그리고 대신을 파견하여 재차 사직과 종묘에 기도했다. 이날 미시(未時,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에 창덕궁의 별당에서 훙서(薨逝, 귀인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했다.’
정조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정약용의 책임감은 더욱 막중했다. 백성뿐만 아니라 이 나라 왕실을 위해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유행병은 잡아야했다. 자신의 희생된 어린 자식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정약용 자신 또한 2살 때 두창(천연두)을 앓았다. 다행이 가볍게 지나가 흔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른쪽 눈썹 위에 조그만 흉터가 남아 있어 눈썹이 세 개로 나뉘게 되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호를 스스로 지었다. 삼미자(三眉子, 눈썹이 세 개인 사람). 그리고 7살 때부터 짓기 시작한 시를 모아 10살 무렵에는 ‘삼미자집’이란 책을 내기도 했었다.
정약용은 마진(홍역)도 앓았다. 그때 그를 구해준 이는 이헌길이라는 의원이었다. 이헌길은 마진에 대해 독자적인 연구를 펼쳐 치료서인 ‘마진기방’이란 의학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살린 아이들이 거의 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정약용 또한 그의 의술 덕분에 살아났다.
정약용은 마과회통을 쓰면서 이헌길의 마진기방이란 책을 참고했다. 그의 책을 읽으며 근원을 찾고 근본을 탐구한 다음, 중국의 여러 책들을 살폈다. 홍역은 전염이 매우 빠르고 고열이 심하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병이었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환자들이 책을 펴면 찾기 편하고 처방을 구하기 쉽게 했다. 무려 다섯 번의 수정을 거친 뒤에야 책이 완성되었다.
정약용은 책을 다 쓰고 흡족한 마음으로 서문을 지었다.
‘……병든 사람에게 의원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모든 병이 다 그렇지만 홍역이 더욱 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의원의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홍역은 몇 년 단위로 한 번씩 발생하는 것이니, 이 홍역 치료를 업으로 삼으면 기대할 만한 이익이 없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또한 환자를 만나서는 치료하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간혹 억측으로 약을 써서 사람을 오히려 일찍 죽게 만드니 정말 잔인한 일이다. ……만약 적의 침입을 예견하여 미리 무기를 손질하고 성곽을 보수해 두면 이기지 못할 전쟁이 없듯이…….’
정약용은 자신의 자식들도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또한 많은 백성들이 홍역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홍역에 관한 종합 치료술을 담은 책을 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인 1798년 9월과 10월, 정약용의 일곱 번째 아들 삼동(三童)이와 막 태어난 여덟 번째 갓난아이가 한 달 사이에 죽어나갔다. 전염병 때문이었다. 그리고 넉 달 뒤에 막내아들 농아가 잉태되어 1799년 12월 2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 아이 역시 3년을 살다가 1802년 11월 30일에 죽은 것이다.
눈물로 쓰는 편지
유배지의 초라한 주막집 사랑방에 홀로 앉아 밤을 새운 정약용은 쓰다만 편지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차가운 눈이 앙상하던 마당을 살포시 덮고 있었다. 정약용은 뜰에서 짚신을 꿰어 신고 마당을 가로질러 사립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답답한 마음에 그저 발길을 옮길 뿐이었다. 추위에도 아랑곳없는 까치 몇 마리가 시끄럽게 울며 느티나무 가지 위를 날아다녔다.
정약용은 자신의 몸보다 서너 배는 굵은 느티나무를 짚고 우두커니 서서 고향 마을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하여 네가 먼저 갔다는 말인가. 살아 있어야할 너는 가고, 죽어야할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니.
정약용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난날 곡산에서 벼슬살이할 때 밤을 새워가며 저술한 ‘마과회통’도 이 흉악한 전염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니. 정약용은 분에 겨워 맨주먹으로 느티나무 밑동을 두들겨도 보았다. 유행병의 창궐이 한 맺힌 귀신의 저주 때문이라며 굿판을 벌이던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동안 차가운 거리에 자신의 몸을 내맡긴 정약용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주막집 마당을 가로질러왔다. 그리고 늙은 주모가 데워온 약주를 빈속에 한 사발 들이키고는 어제 쓰다만 편지를 마저 써내려갔다.
‘……너희들 아래로 무려 사내아이 네 명과 계집아이 하나를 잃었다. 그중 하나는 낳은 지 열흘 남짓해서 죽었기에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겠고 나머지 세 아이는 모두 세 살 때 한창 재롱을 부리다가 죽었다. 이 세 아이는 나와 너희들 어머니가 함께 있을 때 죽었기에 이번같이 간장을 후벼 파는 슬픔은 없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자신의 몸보다 서너 배는 굵은 느티나무를 짚고 우두커니 서서 고향 마을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하여 네가 먼저 갔다는 말인가. 살아 있어야할 너는 가고, 죽어야할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니.
정약용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난날 곡산에서 벼슬살이할 때 밤을 새워가며 저술한 ‘마과회통’도 이 흉악한 전염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니. 정약용은 분에 겨워 맨주먹으로 느티나무 밑동을 두들겨도 보았다. 유행병의 창궐이 한 맺힌 귀신의 저주 때문이라며 굿판을 벌이던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동안 차가운 거리에 자신의 몸을 내맡긴 정약용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시 주막집 마당을 가로질러왔다. 그리고 늙은 주모가 데워온 약주를 빈속에 한 사발 들이키고는 어제 쓰다만 편지를 마저 써내려갔다.
‘……너희들 아래로 무려 사내아이 네 명과 계집아이 하나를 잃었다. 그중 하나는 낳은 지 열흘 남짓해서 죽었기에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겠고 나머지 세 아이는 모두 세 살 때 한창 재롱을 부리다가 죽었다. 이 세 아이는 나와 너희들 어머니가 함께 있을 때 죽었기에 이번같이 간장을 후벼 파는 슬픔은 없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붓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았다. 만약 자신이 곁에 있었다면 농아를 살릴 수 있었을까.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린 것을 품에서 꺼내어 흙구덩이에 집어넣었을 아내의 아픔은 어땠을까. 자신의 고통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어린 것이 어리광부리던 말 한 마디, 귀엽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삼삼하고 귀에 쟁쟁할 것인데, 어찌 살아갈까.
정약용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붓끝이 떨렸다. 손끝에 힘을 주었다.
‘……아무쪼록 너희들은 마음과 뜻을 바쳐 어머니를 잘 섬겨 오래 사시도록 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며느리들을 타일러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방이 차고 따뜻한지를 잘 보살펴드려라. 한시라도 너희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게 할 것이며…….’
정약용은 이내 붓을 멈추었다. 고향에서 울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자 울컥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작년 겨울, 감옥에서 나와 새로운 유배지인 이곳 강진으로 오기 위해 한양을 떠날 때, 아내는 그 어린 것을 업고 과천까지 따라왔었다. 그리고 주막에서 이별을 고할 때 나를 가리키며 “저분이 네 아버지시란다.” 라고 하자, 그 어린 것이 따라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리 아버지다.” 라고 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정약용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참으로 무심하고 한스러운 세월이었다.
얼마 전 아내에게서 온 편지에 그 어린 것이 “아버지, 돌아오셔요. 제가 홍역에 걸렸어요. 아버지, 돌아오셔요, 제가 천연두에 걸렸어요.” 라고 하며 대문을 쳐다보곤 했다고 했다. 그리고 강진에서 사람이 도착할 때마다 내가 보내던 소라 껍데기를 기다리다가 없으면 풀이 죽곤 했다는데, 결국 네가 죽고 나서야 도착했다니…….
정약용은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살포시 쌓였던 눈 위로 다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희뿌옇던 하늘에서 기어코 굵은 눈을 뿌려댔다. 정약용은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어 사립문을 나섰다. 날씨 탓인지 주막집엔 손님마저 끊어지고 누렁이만이 까치를 쫓으며 컹컹대고 짖어댔다. 정약용은 느티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던가. 그토록 애써 지은 ‘마과회통’도 소용이 없다니. 세상사를 적막하게 만드는 역병(전염병)의 끝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흔 줄에 접어든, 젊다면 젊은 정약용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금까지 6남 3녀를 낳았는데 이중에 살아있는 자식이 2남 1녀이고 죽은 자식이 4남 2녀였다. 죽은 자식이 산 자식의 두 배였다. 이 죽은 자식 중에 첫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은 모두 홍역이나 천연두로 죽었다. 순간 정약용의 머릿속에 어떤 위인의 말이 떠올랐다.
‘자녀 가운데 요절한 애가 있으면 아이의 생년월일, 이름, 용모, 죽은 날짜까지 써 놓아 아이가 세상에 다녀간 흔적이라도 남겨 놓아야 한다.’
정약용은 문득 마당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갔다. 급히 걸은 탓에 짚신에 얹혀있던 눈이 마루에까지 흩어졌다. 정약용은 먹은 마음이라도 있듯이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쓰던 편지를 옆으로 밀치고 새로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붓을 들었다.
‘……농아는 곡산에서 임신하여 기미년(1799년) 12월 2일에 태어났고, 임술년(1802년) 11월 30일에 죽었다. 홍역이 천연두가 되었고 천연두가 악화되어 죽은 것이다. 네가 세상에 왔다간 것은 겨우 3년뿐인데 나와 헤어져 산 지는 2년이구나. 사람이 60년을 산다고 할 때, 40년 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지낸 셈이니 얼마나 슬픈 일이냐. 네가 태어났을 때 이 애비의 근심이 깊어 네 이름을 농(農)이라고 했는데, 얼마 뒤에 근심하던 화(禍)가 집안에 미친 것이다. 너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이렇게라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죽을 수만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넘고 한강을 건너 너에게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얼굴은 깍은 듯이 빼어났고 코 왼쪽에 조그마한 점이 있었다. 네가 웃을 때는 양쪽 송곳니가 유난히도 톡 튀어나오곤 했다. 오, 슬픈지고! 나는 오직 너의 모습이나마 잊지 않고 기억해 네가 아비 생각하던 정에 보답해 주련다…….’
정약용은 겨우 글을 끝마치고 제목을 ‘농아광지(農兒壙誌, 농아의 무덤에 넣는 글)’ 라고 써넣었다. 그리고 먼저 쓰다만 편지를 다시 펼쳐 놓고 마저 썼다.
‘……아무쪼록 너희들은 동생의 무덤에 가서 곡을 한 뒤에 이 농아광지를 울면서 읽어주어라. 이 애비가 하듯이 진신으로 슬퍼하며 읽어주어라…….’
편지 쓰기를 마친 정약용은 붓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바다와 하늘이 한 가지 색으로 변한 뒤로 함박눈은 쉼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유배생활과 지긋지긋한 이 전염병의 끝은 언제일까. 방문을 나서는 그의 어깨 위로 눈은 기다렸다는 듯 내려앉고 있었다.
정약용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붓끝이 떨렸다. 손끝에 힘을 주었다.
‘……아무쪼록 너희들은 마음과 뜻을 바쳐 어머니를 잘 섬겨 오래 사시도록 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며느리들을 타일러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방이 차고 따뜻한지를 잘 보살펴드려라. 한시라도 너희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게 할 것이며…….’
정약용은 이내 붓을 멈추었다. 고향에서 울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자 울컥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작년 겨울, 감옥에서 나와 새로운 유배지인 이곳 강진으로 오기 위해 한양을 떠날 때, 아내는 그 어린 것을 업고 과천까지 따라왔었다. 그리고 주막에서 이별을 고할 때 나를 가리키며 “저분이 네 아버지시란다.” 라고 하자, 그 어린 것이 따라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리 아버지다.” 라고 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정약용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참으로 무심하고 한스러운 세월이었다.
얼마 전 아내에게서 온 편지에 그 어린 것이 “아버지, 돌아오셔요. 제가 홍역에 걸렸어요. 아버지, 돌아오셔요, 제가 천연두에 걸렸어요.” 라고 하며 대문을 쳐다보곤 했다고 했다. 그리고 강진에서 사람이 도착할 때마다 내가 보내던 소라 껍데기를 기다리다가 없으면 풀이 죽곤 했다는데, 결국 네가 죽고 나서야 도착했다니…….
정약용은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살포시 쌓였던 눈 위로 다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희뿌옇던 하늘에서 기어코 굵은 눈을 뿌려댔다. 정약용은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걸어 사립문을 나섰다. 날씨 탓인지 주막집엔 손님마저 끊어지고 누렁이만이 까치를 쫓으며 컹컹대고 짖어댔다. 정약용은 느티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던가. 그토록 애써 지은 ‘마과회통’도 소용이 없다니. 세상사를 적막하게 만드는 역병(전염병)의 끝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흔 줄에 접어든, 젊다면 젊은 정약용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금까지 6남 3녀를 낳았는데 이중에 살아있는 자식이 2남 1녀이고 죽은 자식이 4남 2녀였다. 죽은 자식이 산 자식의 두 배였다. 이 죽은 자식 중에 첫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은 모두 홍역이나 천연두로 죽었다. 순간 정약용의 머릿속에 어떤 위인의 말이 떠올랐다.
‘자녀 가운데 요절한 애가 있으면 아이의 생년월일, 이름, 용모, 죽은 날짜까지 써 놓아 아이가 세상에 다녀간 흔적이라도 남겨 놓아야 한다.’
정약용은 문득 마당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갔다. 급히 걸은 탓에 짚신에 얹혀있던 눈이 마루에까지 흩어졌다. 정약용은 먹은 마음이라도 있듯이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쓰던 편지를 옆으로 밀치고 새로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붓을 들었다.
‘……농아는 곡산에서 임신하여 기미년(1799년) 12월 2일에 태어났고, 임술년(1802년) 11월 30일에 죽었다. 홍역이 천연두가 되었고 천연두가 악화되어 죽은 것이다. 네가 세상에 왔다간 것은 겨우 3년뿐인데 나와 헤어져 산 지는 2년이구나. 사람이 60년을 산다고 할 때, 40년 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지낸 셈이니 얼마나 슬픈 일이냐. 네가 태어났을 때 이 애비의 근심이 깊어 네 이름을 농(農)이라고 했는데, 얼마 뒤에 근심하던 화(禍)가 집안에 미친 것이다. 너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이렇게라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죽을 수만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넘고 한강을 건너 너에게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얼굴은 깍은 듯이 빼어났고 코 왼쪽에 조그마한 점이 있었다. 네가 웃을 때는 양쪽 송곳니가 유난히도 톡 튀어나오곤 했다. 오, 슬픈지고! 나는 오직 너의 모습이나마 잊지 않고 기억해 네가 아비 생각하던 정에 보답해 주련다…….’
정약용은 겨우 글을 끝마치고 제목을 ‘농아광지(農兒壙誌, 농아의 무덤에 넣는 글)’ 라고 써넣었다. 그리고 먼저 쓰다만 편지를 다시 펼쳐 놓고 마저 썼다.
‘……아무쪼록 너희들은 동생의 무덤에 가서 곡을 한 뒤에 이 농아광지를 울면서 읽어주어라. 이 애비가 하듯이 진신으로 슬퍼하며 읽어주어라…….’
편지 쓰기를 마친 정약용은 붓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바다와 하늘이 한 가지 색으로 변한 뒤로 함박눈은 쉼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유배생활과 지긋지긋한 이 전염병의 끝은 언제일까. 방문을 나서는 그의 어깨 위로 눈은 기다렸다는 듯 내려앉고 있었다.
참고문헌
『자식 잃은 슬픔으로 지은 의학서 마과회통』 이병유.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민음사.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박석무. 창비.
『사암선생 연보』 정규영. 창비.
『자식 잃은 슬픔으로 지은 의학서 마과회통』 이병유.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민음사.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박석무. 창비.
『사암선생 연보』 정규영. 창비.
스토리원고 | | | 채종인 소설가 |
연구원고 | | | 이병유 박사 |
일러스트 | | | 컬처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