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 유형원_어찌 사람을 재물로 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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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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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사람을 재물로 보느냐?
‘스스슥!’
마을 밖 갈대숲이 수상했다.
‘스스슥!’
소리는 이따금 났다가 사리지곤 했다.
‘스스슥!’
한 사내아이가 자기키보다 큰 갈대숲을 내달렸다. 온몸이 찢기고 얼굴에 땟국이 흘렀다. 쫓기듯 달리던 아이가 냇물을 보자 얼굴을 담그고 허겁지겁 들이켰다. 며칠을 굶은 것일까. 물로 배를 채운 아이는 그대로 갈대밭에 신실하듯 쓰러졌다.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초여름 저녁이었다. 빽빽한 개구리 울음소리만이 아이 곁을 지켜주었다.
그때였다.
“불이야!”
관아가 있는 망루 쪽에서 여러 명의 나졸들이 우왕좌왕했다.
‘땡! 땡! 땡! 땡!…….’
“불이야! 관아에 불이 났다! 공노비들이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땡! 땡! 땡! 땡!…….’
나졸 하나가 귀청이 찢어질 듯 종을 쳤다. 아이가 쓰러진 곳에서 멀지 않은 데서 불이 났다. 불길은 관원들이 정무를 보던 건물 기와지붕에서 솟았다. 조선(朝鮮) 효종(孝宗) 3년이었다. 불을 지른 장정 몇은 이미 관아 담장을 넘은 뒤였다.
“관아에 불이 났다! 불이야! 도망치는 공노비들을 잡아라!”
‘땡! 땡! 땡! 땡!…….’
“아이고! 저걸 어째! 이게 웬 소란이랴?”
‘땡! 땡! 땡! 땡!…….’
“어느 놈 소행이냐?”
“쇤네도 모릅죠. 공노비들이 질렀다나 뭐라나!”
“어서 가서 불부터 끕시다!”
종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관아 담장 밖, 수상한 그림자 몇이 유유히 사라졌다.
“불이야! 공노비들이 불을 질렀다! 관아에 불이 났다!”
화재진압 담당인 멸화군들이 사다리, 쇠갈고리, 불채, 물그릇들을 갖고 왔다. 멸화군 몇은 불채를 물에 적셔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랐다. 불채는 한쪽 끝이 대걸레처럼 생긴 화재진압용 막대기였다. 걸레처럼 천이 묶인 곳에 물을 듬뿍 적셔 불길을 두드렸다. 마을사람들은 냇물까지 일렬로 줄을 서 물을 퍼 날랐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달리는 아낙들도 보였다. 어떤 나졸은 불 난 지붕에 사다리를 놓고 급히 올라갔다. 불채를 들고 올라간 나졸들이 조금씩 불길을 잡아갔다. 모두 불을 끄느라 사방으로 뛰었다. 물독과 우물이 있는 방화수로 달렸다. 관청에 비치한 우물도 바닥이 났다. 다행히 불길은 잡혀갔다.
마을 밖 갈대숲이 수상했다.
‘스스슥!’
소리는 이따금 났다가 사리지곤 했다.
‘스스슥!’
한 사내아이가 자기키보다 큰 갈대숲을 내달렸다. 온몸이 찢기고 얼굴에 땟국이 흘렀다. 쫓기듯 달리던 아이가 냇물을 보자 얼굴을 담그고 허겁지겁 들이켰다. 며칠을 굶은 것일까. 물로 배를 채운 아이는 그대로 갈대밭에 신실하듯 쓰러졌다.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초여름 저녁이었다. 빽빽한 개구리 울음소리만이 아이 곁을 지켜주었다.
그때였다.
“불이야!”
관아가 있는 망루 쪽에서 여러 명의 나졸들이 우왕좌왕했다.
‘땡! 땡! 땡! 땡!…….’
“불이야! 관아에 불이 났다! 공노비들이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땡! 땡! 땡! 땡!…….’
나졸 하나가 귀청이 찢어질 듯 종을 쳤다. 아이가 쓰러진 곳에서 멀지 않은 데서 불이 났다. 불길은 관원들이 정무를 보던 건물 기와지붕에서 솟았다. 조선(朝鮮) 효종(孝宗) 3년이었다. 불을 지른 장정 몇은 이미 관아 담장을 넘은 뒤였다.
“관아에 불이 났다! 불이야! 도망치는 공노비들을 잡아라!”
‘땡! 땡! 땡! 땡!…….’
“아이고! 저걸 어째! 이게 웬 소란이랴?”
‘땡! 땡! 땡! 땡!…….’
“어느 놈 소행이냐?”
“쇤네도 모릅죠. 공노비들이 질렀다나 뭐라나!”
“어서 가서 불부터 끕시다!”
종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관아 담장 밖, 수상한 그림자 몇이 유유히 사라졌다.
“불이야! 공노비들이 불을 질렀다! 관아에 불이 났다!”
화재진압 담당인 멸화군들이 사다리, 쇠갈고리, 불채, 물그릇들을 갖고 왔다. 멸화군 몇은 불채를 물에 적셔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랐다. 불채는 한쪽 끝이 대걸레처럼 생긴 화재진압용 막대기였다. 걸레처럼 천이 묶인 곳에 물을 듬뿍 적셔 불길을 두드렸다. 마을사람들은 냇물까지 일렬로 줄을 서 물을 퍼 날랐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달리는 아낙들도 보였다. 어떤 나졸은 불 난 지붕에 사다리를 놓고 급히 올라갔다. 불채를 들고 올라간 나졸들이 조금씩 불길을 잡아갔다. 모두 불을 끄느라 사방으로 뛰었다. 물독과 우물이 있는 방화수로 달렸다. 관청에 비치한 우물도 바닥이 났다. 다행히 불길은 잡혀갔다.
삽시간에 도망친 노비 얼굴이 곳곳에 방으로 나붙었다. 글을 읽던 유형원이 먼발치서 마을을 내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다음날 해가 질 무렵이었다.
유형원은 어린 딸 수옥과 함께 들길을 걸었다. 풀물이 번진 세상은 여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갈대밭은 키가 높고 초록이 짙었다. 수옥은 올해 여덟 살이었다. 유형원과 딸 수옥은 산책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섭다리 위를 걸었다.
“아버지, 잠시만요.”
머리에 곱게 뱃씨댕기를 한 수옥이 나비를 보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유형원은 빙그레 웃으며 기다려주었다. 수옥이 몰래 다가가자 나비가 팔랑팔랑 다른 풀로 옮겨갔다. 수옥이 또 몇 걸음 다가갔다. 유형원이 어여쁜 딸을 보며 말했다.
“허허허. 수옥아 그만 가자꾸나.”
나비는 또 다른 솔가지 위로 옮겨갔다. 수옥이 다시 살금살금 다가가던 그때였다.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거다! 어서 쫓아라!”
손에 칼과 몽둥이를 든 추노꾼들이 섭다리 위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비키슈! 바쁘니 먼저 좀 갑시다!”
추노꾼들이 유형원과 수옥 앞을 거칠게 지나갔다. 장정들 무게로 섭다리가 출렁였다. 그 순간 어린 수옥이 중심을 잃었다. 추노꾼은 순식간에 다리를 건너 들판 멀리 사라진 후였다. 발을 헛디딘 수옥이 개울물로 떨어지고 말았다.
“으악!”
‘첨벙!’
“저런! 수옥아! 잠시만 기다려라. 물은 깊지 않을 게다. 에비가 손잡아 주마.”
유형원이 다급히 섭다리 아래로 내려갈 곳을 찾아 서성였다.
“아버지! 살려주세요!”
물에 빠진 수옥이 조금씩 떠내려갔다. 유형원이 물로 뛰어들려는 그때였다. 갈대숲에서 한 아이가 화살처럼 달려 나왔다. 아이는 첨벙거리며 냇물을 가로질렀다. 그러더니 수옥을 건져 등에 업고 물 밖으로 나왔다. 아이가 등에서 수옥을 내려놓고 젖은 치마를 가지런히 해주었다. 다행히 수옥은 다치지 않았다. 아이가 수옥을 살피며 물었다.
“아씨. 괜찮으세요?”
수옥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풀숲에서 나타난 사내아이의 행색은 남루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유형원도 놀란 얼굴이었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다 싶었던 유형원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내 딸을 구해줘 고맙구나. 헌데 넌 어디 사는 누구냐?”
“저는 덕구라 하옵니다.”
“덕구? 사는 곳은 어디냐?”
“변산 쪽에 살았습니다.”
“변산? 변산이라면 이곳 한양에서 무척 먼 곳인데 어떻게 예까지 왔느냐?”
올 해 열네 살인 덕구는 공노비였다. 방금 전 어딘가로 내달리던 추노꾼들은 덕구를 쫓던 중이었다. 덕구는 그것을 알고 갈대숲에 숨어있었다. 그러다 물에 빠진 수옥을 발견한 것이었다. 유형원은 덕구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일단 아이를 집으로 데려갔다. 유형원은 그날 밤 덕구의 딱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덕구는 변산에서 태어났다. 덕구의 아버지는 양반이었고 엄마도 양반이었다. 그 당시는 종부법이 시행 중이었다. 양반이었던 아버지 덕에 양반 신분이었던 덕구는 글도 배우고 그럭저럭 자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림병으로 죽게 되었다. 홀로 남겨진 엄마는 재혼을 하게 되었다. 재혼한 새아버지는 엄마와 달리 노비신분이었다. 양반 신분이었던 덕구는 새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갑자기 노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후 덕구는 공노비로 차출되어 이곳저곳 끌려 다녔다. 한양이 어딘지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팔려와 노예처럼 갖은 고생을 했다.
‘이렇게 혹독하게 일만 하다간 엄마도 못 보고 죽게 될 거야.’
덕구는 공노비로 2년을 일하다 재빨리 도망쳤다.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으로 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가야할지 막막했다. 길에서 잠자고 구걸하며 세월이 갔다. 덕구의 형편을 들은 유형원은 아비가 요절한 자신의 신세가 떠올라 연민이 느껴졌다. 유형원이 아이에게 말했다.
“덕구라 했느냐?”
“네, 나리.”
“네가 원하면 이곳에 묵어도 좋다. 노자라도 마련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 내 집에서 일정기간 일을 하면 내가 품삯을 쳐주마. 그 돈을 모아서 고향에 가거라. 가서 네 부모를 찾고 당당히 농사도 지어라. 지금 추노꾼들이 너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게야. 더구나 어제 관아에 불까지 났다. 도망친 공노비들 소행이라고 방이 붙고 추노꾼들이 쫙 깔렸어. 이대로 나가면 너는 위험하다. 잠시 시간도 벌 겸 이곳에 머물다 그들이 이곳을 벗어나면 그 때 고향으로 가거라.”
“감사합니다. 나리.”
유형원이 딸에게 일렀다.
“수옥아. 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다. 감사인사는 해야지?”
수옥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버지. 저 아이는 천한 노비인데 제가 인사까지 해야 합니까? 옷도 너무 더럽습니다.”
악취가 난다는 듯 수옥이 코를 잡았다. 유형원이 딸을 타일렀다.
“수옥아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도리다. 감사하는 마음 앞에 어찌 신분의 높낮이부터 내세우는 것이냐? 어서 인사해라.”
야단맞은 수옥이 덕구를 흘깃 쳐다봤다.
“고, 고맙다. 생명을 구해줘서.”
수옥의 인사에 덕구가 빙그레 웃었다. 덕구는 감사한 마음에 밥값이라도 하고 싶었다. 벌떡 일어난 덕구가 마당으로 나가더니 지게로 장작을 날랐다.
다음날 해가 질 무렵이었다.
유형원은 어린 딸 수옥과 함께 들길을 걸었다. 풀물이 번진 세상은 여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갈대밭은 키가 높고 초록이 짙었다. 수옥은 올해 여덟 살이었다. 유형원과 딸 수옥은 산책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섭다리 위를 걸었다.
“아버지, 잠시만요.”
머리에 곱게 뱃씨댕기를 한 수옥이 나비를 보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유형원은 빙그레 웃으며 기다려주었다. 수옥이 몰래 다가가자 나비가 팔랑팔랑 다른 풀로 옮겨갔다. 수옥이 또 몇 걸음 다가갔다. 유형원이 어여쁜 딸을 보며 말했다.
“허허허. 수옥아 그만 가자꾸나.”
나비는 또 다른 솔가지 위로 옮겨갔다. 수옥이 다시 살금살금 다가가던 그때였다.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거다! 어서 쫓아라!”
손에 칼과 몽둥이를 든 추노꾼들이 섭다리 위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비키슈! 바쁘니 먼저 좀 갑시다!”
추노꾼들이 유형원과 수옥 앞을 거칠게 지나갔다. 장정들 무게로 섭다리가 출렁였다. 그 순간 어린 수옥이 중심을 잃었다. 추노꾼은 순식간에 다리를 건너 들판 멀리 사라진 후였다. 발을 헛디딘 수옥이 개울물로 떨어지고 말았다.
“으악!”
‘첨벙!’
“저런! 수옥아! 잠시만 기다려라. 물은 깊지 않을 게다. 에비가 손잡아 주마.”
유형원이 다급히 섭다리 아래로 내려갈 곳을 찾아 서성였다.
“아버지! 살려주세요!”
물에 빠진 수옥이 조금씩 떠내려갔다. 유형원이 물로 뛰어들려는 그때였다. 갈대숲에서 한 아이가 화살처럼 달려 나왔다. 아이는 첨벙거리며 냇물을 가로질렀다. 그러더니 수옥을 건져 등에 업고 물 밖으로 나왔다. 아이가 등에서 수옥을 내려놓고 젖은 치마를 가지런히 해주었다. 다행히 수옥은 다치지 않았다. 아이가 수옥을 살피며 물었다.
“아씨. 괜찮으세요?”
수옥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풀숲에서 나타난 사내아이의 행색은 남루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유형원도 놀란 얼굴이었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다 싶었던 유형원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내 딸을 구해줘 고맙구나. 헌데 넌 어디 사는 누구냐?”
“저는 덕구라 하옵니다.”
“덕구? 사는 곳은 어디냐?”
“변산 쪽에 살았습니다.”
“변산? 변산이라면 이곳 한양에서 무척 먼 곳인데 어떻게 예까지 왔느냐?”
올 해 열네 살인 덕구는 공노비였다. 방금 전 어딘가로 내달리던 추노꾼들은 덕구를 쫓던 중이었다. 덕구는 그것을 알고 갈대숲에 숨어있었다. 그러다 물에 빠진 수옥을 발견한 것이었다. 유형원은 덕구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일단 아이를 집으로 데려갔다. 유형원은 그날 밤 덕구의 딱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덕구는 변산에서 태어났다. 덕구의 아버지는 양반이었고 엄마도 양반이었다. 그 당시는 종부법이 시행 중이었다. 양반이었던 아버지 덕에 양반 신분이었던 덕구는 글도 배우고 그럭저럭 자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림병으로 죽게 되었다. 홀로 남겨진 엄마는 재혼을 하게 되었다. 재혼한 새아버지는 엄마와 달리 노비신분이었다. 양반 신분이었던 덕구는 새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갑자기 노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후 덕구는 공노비로 차출되어 이곳저곳 끌려 다녔다. 한양이 어딘지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팔려와 노예처럼 갖은 고생을 했다.
‘이렇게 혹독하게 일만 하다간 엄마도 못 보고 죽게 될 거야.’
덕구는 공노비로 2년을 일하다 재빨리 도망쳤다.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으로 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가야할지 막막했다. 길에서 잠자고 구걸하며 세월이 갔다. 덕구의 형편을 들은 유형원은 아비가 요절한 자신의 신세가 떠올라 연민이 느껴졌다. 유형원이 아이에게 말했다.
“덕구라 했느냐?”
“네, 나리.”
“네가 원하면 이곳에 묵어도 좋다. 노자라도 마련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 내 집에서 일정기간 일을 하면 내가 품삯을 쳐주마. 그 돈을 모아서 고향에 가거라. 가서 네 부모를 찾고 당당히 농사도 지어라. 지금 추노꾼들이 너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게야. 더구나 어제 관아에 불까지 났다. 도망친 공노비들 소행이라고 방이 붙고 추노꾼들이 쫙 깔렸어. 이대로 나가면 너는 위험하다. 잠시 시간도 벌 겸 이곳에 머물다 그들이 이곳을 벗어나면 그 때 고향으로 가거라.”
“감사합니다. 나리.”
유형원이 딸에게 일렀다.
“수옥아. 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다. 감사인사는 해야지?”
수옥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버지. 저 아이는 천한 노비인데 제가 인사까지 해야 합니까? 옷도 너무 더럽습니다.”
악취가 난다는 듯 수옥이 코를 잡았다. 유형원이 딸을 타일렀다.
“수옥아 은혜를 입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도리다. 감사하는 마음 앞에 어찌 신분의 높낮이부터 내세우는 것이냐? 어서 인사해라.”
야단맞은 수옥이 덕구를 흘깃 쳐다봤다.
“고, 고맙다. 생명을 구해줘서.”
수옥의 인사에 덕구가 빙그레 웃었다. 덕구는 감사한 마음에 밥값이라도 하고 싶었다. 벌떡 일어난 덕구가 마당으로 나가더니 지게로 장작을 날랐다.
며칠 후, 유형원이 멀리 출타 준비를 했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유형원은 시간만 나면 산천을 떠돌았다. 그는 여지지를 만들기 위해 자주 길을 떠났다. 그의 아내가 배웅하며 물었다.
“작년에는 충청도 쪽을 다녀오시더니. 이번에도 늦으세요?”
“아마 늦을 거요. 이번에는 금강산 쪽을 다녀오려 하오. 내가 집을 비우더라도 해가지면 노비들 일 그만하고 쉬게 하시오. 출산이나 초상이나 병자가 생긴 노비는 각별히 더 챙기고.”
“그런 건 염려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유형원이 떠나고 집에는 부인과 딸과 노비 몇 만 남았다. 유형원은 방방곡곡을 다녔다. 산을 오르고 냇물을 건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렸다. 지도에 나와 있는 저수지를 찾아가 보았다. 죽을힘을 다해 언덕을 오르고 산비탈을 올라 지도에 있는 저수지 둑에 올라섰다. 저수지를 눈으로 직접 둘러본 그가 혀를 찼다.
“허허. 이럴 수가. 말이 저수지지 이곳은 물도 전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둑은 무너지고……. 안되겠다. 내가라도 이 모두를 정확하고 자세히 표시하고 기록을 남겨야겠어. 훗날 반드시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올 게야.”
그는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는 실사구시의 태도를 갖고 살았다. 유형원은 산천을 돌고 한참 만에 집으로 향했다. 걷고 걸어 날이 어둑어둑해질 쯤 마을에 당도했다. 저녁 무렵이라 조용해야 할 마을이 온통 술렁였다. 고샅길마다 흙먼지가 부옇게 떠다녔다. 그 마을에 험상궂은 추노꾼들이 닥친 것이었다.
“샅샅이 뒤져라!”
그들은 도망친 노비들을 찾느라 마을을 발칵 뒤집었다. 유형원의 집 행랑아범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이집 저집 뒤지던 추노꾼들이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거칠게 들어섰다.
“어딜 함부로 들어오쇼? 썩 나가시오!”
행랑아범이 그들을 내쫓았다.
“이봐 노비영감탱이. 다치기 싫으면 적당히 물러나 있어!”
그들은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사내 둘의 얼굴은 험상궂은 모습이었다. 문밖이 소란하자 안채에서 유형원 부인이 나왔다.
“웬 소란이냐?”
그들이 유형원 부인을 노려보았다. 추노꾼 하나가 입에 나뭇가지를 씹으며 물었다.
“마님, 도망친 노비 놈을 찾는뎁쇼. 이놈 혹시 못 보셨소? 낄낄낄.”
추노꾼이 내민 종이에는 사내아이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모습은 덕구였다.
부인은 흠칫 놀라 대답했다.
“못 봤네. 그런 얼굴이 이 집에 있을 리 없잖은가? 어서 나가게.”
사랑채 마당을 쓸고 나오던 덕구가 안채 쪽에서 추노꾼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자신을 쫓던 패거리였다. 혼비백산한 덕구는 바깥 행랑채 쪽으로 뛰었다. 숨을 곳을 찾다가 급히 외양간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추노꾼들은 부인의 만류에도 집 안팎을 살폈다. 추노꾼 중 하나가 기척을 들었는지 바깥채로 나왔다. 그가 질겅질겅 나뭇가지를 씹으며 외양간으로 다가갔다. 암소 한 마리가 덕구 때문에 놀라 콧김을 킁킁대고 앞발을 굴렀다. 뒤에 숨었던 덕구가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뭔가 낌새를 눈치 챈 추노꾼이 외양간 앞으로 바싹 다가가 목을 빼고 안을 살폈다. 안쪽에 누더기 같은 뭔가가 얼핏 보였다. 추노꾼 눈이 번쩍 빛났다. 덕구는 잡힐까봐 겁이 났다. 아이의 심장은 겁에 질려 방망이질 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추노꾼이 외양간을 단번에 뛰어넘어 덕구를 잡아끌고 나왔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여기 숨으면 우리가 못 찾을 줄 알았지? 당장 끌고 가!”
덕구는 이제 죽는구나 싶어 두 눈을 감았다.
“당장 멈춰라! 남의 집에 들어와 무슨 행패냐?”
언제 왔는지 유형원이 엄한 음성으로 추노꾼을 나무랐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추노꾼이 눈을 치켜뜨며 유형원에게 얼굴을 디밀었다.
“영감님, 도망노비 잡으러 다니는 건 관아의 공무인거 모르쇼? 방해하지 말고 당장 비키쇼!”
유형원의 노기어린 얼굴이 추노꾼을 향해 소리쳤다.
“작년에는 충청도 쪽을 다녀오시더니. 이번에도 늦으세요?”
“아마 늦을 거요. 이번에는 금강산 쪽을 다녀오려 하오. 내가 집을 비우더라도 해가지면 노비들 일 그만하고 쉬게 하시오. 출산이나 초상이나 병자가 생긴 노비는 각별히 더 챙기고.”
“그런 건 염려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유형원이 떠나고 집에는 부인과 딸과 노비 몇 만 남았다. 유형원은 방방곡곡을 다녔다. 산을 오르고 냇물을 건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렸다. 지도에 나와 있는 저수지를 찾아가 보았다. 죽을힘을 다해 언덕을 오르고 산비탈을 올라 지도에 있는 저수지 둑에 올라섰다. 저수지를 눈으로 직접 둘러본 그가 혀를 찼다.
“허허. 이럴 수가. 말이 저수지지 이곳은 물도 전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둑은 무너지고……. 안되겠다. 내가라도 이 모두를 정확하고 자세히 표시하고 기록을 남겨야겠어. 훗날 반드시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올 게야.”
그는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는 실사구시의 태도를 갖고 살았다. 유형원은 산천을 돌고 한참 만에 집으로 향했다. 걷고 걸어 날이 어둑어둑해질 쯤 마을에 당도했다. 저녁 무렵이라 조용해야 할 마을이 온통 술렁였다. 고샅길마다 흙먼지가 부옇게 떠다녔다. 그 마을에 험상궂은 추노꾼들이 닥친 것이었다.
“샅샅이 뒤져라!”
그들은 도망친 노비들을 찾느라 마을을 발칵 뒤집었다. 유형원의 집 행랑아범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이집 저집 뒤지던 추노꾼들이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거칠게 들어섰다.
“어딜 함부로 들어오쇼? 썩 나가시오!”
행랑아범이 그들을 내쫓았다.
“이봐 노비영감탱이. 다치기 싫으면 적당히 물러나 있어!”
그들은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사내 둘의 얼굴은 험상궂은 모습이었다. 문밖이 소란하자 안채에서 유형원 부인이 나왔다.
“웬 소란이냐?”
그들이 유형원 부인을 노려보았다. 추노꾼 하나가 입에 나뭇가지를 씹으며 물었다.
“마님, 도망친 노비 놈을 찾는뎁쇼. 이놈 혹시 못 보셨소? 낄낄낄.”
추노꾼이 내민 종이에는 사내아이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모습은 덕구였다.
부인은 흠칫 놀라 대답했다.
“못 봤네. 그런 얼굴이 이 집에 있을 리 없잖은가? 어서 나가게.”
사랑채 마당을 쓸고 나오던 덕구가 안채 쪽에서 추노꾼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자신을 쫓던 패거리였다. 혼비백산한 덕구는 바깥 행랑채 쪽으로 뛰었다. 숨을 곳을 찾다가 급히 외양간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추노꾼들은 부인의 만류에도 집 안팎을 살폈다. 추노꾼 중 하나가 기척을 들었는지 바깥채로 나왔다. 그가 질겅질겅 나뭇가지를 씹으며 외양간으로 다가갔다. 암소 한 마리가 덕구 때문에 놀라 콧김을 킁킁대고 앞발을 굴렀다. 뒤에 숨었던 덕구가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뭔가 낌새를 눈치 챈 추노꾼이 외양간 앞으로 바싹 다가가 목을 빼고 안을 살폈다. 안쪽에 누더기 같은 뭔가가 얼핏 보였다. 추노꾼 눈이 번쩍 빛났다. 덕구는 잡힐까봐 겁이 났다. 아이의 심장은 겁에 질려 방망이질 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추노꾼이 외양간을 단번에 뛰어넘어 덕구를 잡아끌고 나왔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여기 숨으면 우리가 못 찾을 줄 알았지? 당장 끌고 가!”
덕구는 이제 죽는구나 싶어 두 눈을 감았다.
“당장 멈춰라! 남의 집에 들어와 무슨 행패냐?”
언제 왔는지 유형원이 엄한 음성으로 추노꾼을 나무랐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추노꾼이 눈을 치켜뜨며 유형원에게 얼굴을 디밀었다.
“영감님, 도망노비 잡으러 다니는 건 관아의 공무인거 모르쇼? 방해하지 말고 당장 비키쇼!”
유형원의 노기어린 얼굴이 추노꾼을 향해 소리쳤다.
“네 이놈! 당장 그 손 놓아라! 그 아이는 노비가 아니야! 똑바로 알고 잡아도 잡아야지!”
유형원의 말에 추노꾼들이 멍하니 쳐다봤다.
“노비가 아니라굽쇼? 영감님, 이 방(榜)을 보고도 그런 말하시오? 틀림없이 이놈인뎁쇼.”
그들이 덕구의 얼굴이 그려진 방을 유형원 앞에 내밀었다.
“똑똑히 들어라. 이 아이의 모친은 양반이다. 이 아인 노비가 아니야! 당장 그 아이를 놓아주고 이곳을 나가라! 당장!”
추노꾼들의 얼굴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일그러졌다.
“당장 못 나가겠느냐? 물볼기 맞을 보고 싶으냐?”
서슬 퍼런 유형원에게 추노꾼들은 차마 대들 수 없었다.
“아씨! 재수 옴 붙었네…… 너! 오늘은 놔주는데 다음에 잡히면 끝이다! 알았어?”
유형원의 엄포에 추노꾼들은 어쩔 수 없이 덕구를 놓아주고 밖으로 사라졌다.
‘휴우…….’
덕구는 십년감수했다. 하마터면 개처럼 끌려갈 뻔했다.
“얘야. 괜찮으냐?”
덕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엎드려 숨다보니 무릎과 양손에 소똥이 잔뜩 묻어있었다. 유형원은 늘 노비세습을 반대해왔다. 아이는 겁에 질린 새끼짐승처럼 떨고 있었다. 그런 덕구가 유형원은 참으로 딱했다.
‘동물이 아닌 사람이거늘. 사람이 어찌 이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덕구의 쫓기는 삶을 보면서 유형원은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더 심각하게 깨달았다.
유형원의 말에 추노꾼들이 멍하니 쳐다봤다.
“노비가 아니라굽쇼? 영감님, 이 방(榜)을 보고도 그런 말하시오? 틀림없이 이놈인뎁쇼.”
그들이 덕구의 얼굴이 그려진 방을 유형원 앞에 내밀었다.
“똑똑히 들어라. 이 아이의 모친은 양반이다. 이 아인 노비가 아니야! 당장 그 아이를 놓아주고 이곳을 나가라! 당장!”
추노꾼들의 얼굴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일그러졌다.
“당장 못 나가겠느냐? 물볼기 맞을 보고 싶으냐?”
서슬 퍼런 유형원에게 추노꾼들은 차마 대들 수 없었다.
“아씨! 재수 옴 붙었네…… 너! 오늘은 놔주는데 다음에 잡히면 끝이다! 알았어?”
유형원의 엄포에 추노꾼들은 어쩔 수 없이 덕구를 놓아주고 밖으로 사라졌다.
‘휴우…….’
덕구는 십년감수했다. 하마터면 개처럼 끌려갈 뻔했다.
“얘야. 괜찮으냐?”
덕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엎드려 숨다보니 무릎과 양손에 소똥이 잔뜩 묻어있었다. 유형원은 늘 노비세습을 반대해왔다. 아이는 겁에 질린 새끼짐승처럼 떨고 있었다. 그런 덕구가 유형원은 참으로 딱했다.
‘동물이 아닌 사람이거늘. 사람이 어찌 이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덕구의 쫓기는 삶을 보면서 유형원은 노비제도의 문제점을 더 심각하게 깨달았다.
유형원은 서책에 현 세태를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나라의 부를 물으면 마수로 대답하였다. 이는 비록 천자나 제후라 하더라도 다만 사람을 다스리는 소임이 되고 일찍 사람으로 자기의 재물을 삼지는 않은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풍속은 사람의 부를 물으면 반드시, 노비와 전지로 말한다. 여기에서 또한 그 법의 잘못되고 풍속의 고질 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노비로 재물을 삼으니, 대저 사람은 동류인데 어찌 사람이 사람으로 재물을 삼는 이치가 있겠는가? 물과 바람은 반상을 차별하지 않거늘…… 하물며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사는, 생각과 지각이 있다는 사람이, 어찌 차별을 당해야 하는가. 인간이 인간을 부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노비제도는 인도주의적으로도 부당한 제도다.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다스리는 임무를 맡은 것일 뿐 사람을 재산으로 여길 수 는 없다. 오늘날의 노비는 노비 자신의 죄에 대한 결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조상으로부터의 대물림으로 노비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노비 신분이 세습되는 것을 옳지 않다. 노비세습은 잘못 된 것이야. 노비제도는 불합리한 것이다.
유형원은 또 천천히 적어나갔다.
노비세습은 이미 우리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단기간에 이를 폐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 노비제도를 급히 바꿀 수 없다면, 노비에게 노동의 대가로 돈을 주고 부리는 고립(雇立)이라는 방법부터 모색해 나가야 한다.
몇 달이 흘렀다.
덕구는 나날이 노잣돈이 모아졌다. 이제 고향집으로 가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덕구가 고향을 찾아 나섰다. 유형원과 부인은 덕구에게 먹을 것을 정성껏 챙겨주고 배웅했다.
이듬해 봄, 유형원은 큰 결심을 했다.
부인과 딸은 한양에 두고 그는 홀로 전라도 우반동으로 내려갔다. 유형원의 조부가 물려준 농장이 거기에 있었다. 선계폭포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반계(磻溪)라는 냇물의 오른쪽 동네가 우반동(右磻洞)이었다. 유형원은 선계폭포 바로 밑에 반계서원을 짓고 글을 읽고 책을 지으며 머물렀다. 어느 날 주변을 둘러보던 유형원은 뜻밖에도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너, 덕구 아니냐?”
그렇게 덕구를 다시 만났다. 변산에 살던 덕구네 식구는 농지를 찾아 이곳으로 옮겨와 품을 팔며 살고 있었다. 덕구의 부모는 유형원에게 아들의 은인이라며 감사했다. 덕구는 수시로 먹을 것을 싸들고 유형원 거처에 놀러왔다. 그곳에서도 부패한 양반들의 노비 핍박은 여전했다. 보다 못한 유형원이 크게 분노해 그들을 나무랐다.
“뭣들 하는 짓이냐? 구름이 바람을 자기 재산이라고 우기더냐? 고마운 태양빛을 쬐면서 너희는 그 대가로 엽전 한 푼 낸 적 있느냐? 너희 집 화단에 꽃이 필 때, 너희에게 돈 받고 피더냐? 헌데! 어찌 너희는 사람을 함부로 보느냐? 어찌 사람을 재물로 보는 것이야! 어찌 사람 위에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못된 것들 같으니!”
우반동에서 유형원은 노비세습 폐지에 대한 방안을 본격적으로 고민했다. 그때부터 그는 노비세습을 반대하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적어둔 초안을 바탕으로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덕구는 나날이 노잣돈이 모아졌다. 이제 고향집으로 가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덕구가 고향을 찾아 나섰다. 유형원과 부인은 덕구에게 먹을 것을 정성껏 챙겨주고 배웅했다.
이듬해 봄, 유형원은 큰 결심을 했다.
부인과 딸은 한양에 두고 그는 홀로 전라도 우반동으로 내려갔다. 유형원의 조부가 물려준 농장이 거기에 있었다. 선계폭포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반계(磻溪)라는 냇물의 오른쪽 동네가 우반동(右磻洞)이었다. 유형원은 선계폭포 바로 밑에 반계서원을 짓고 글을 읽고 책을 지으며 머물렀다. 어느 날 주변을 둘러보던 유형원은 뜻밖에도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너, 덕구 아니냐?”
그렇게 덕구를 다시 만났다. 변산에 살던 덕구네 식구는 농지를 찾아 이곳으로 옮겨와 품을 팔며 살고 있었다. 덕구의 부모는 유형원에게 아들의 은인이라며 감사했다. 덕구는 수시로 먹을 것을 싸들고 유형원 거처에 놀러왔다. 그곳에서도 부패한 양반들의 노비 핍박은 여전했다. 보다 못한 유형원이 크게 분노해 그들을 나무랐다.
“뭣들 하는 짓이냐? 구름이 바람을 자기 재산이라고 우기더냐? 고마운 태양빛을 쬐면서 너희는 그 대가로 엽전 한 푼 낸 적 있느냐? 너희 집 화단에 꽃이 필 때, 너희에게 돈 받고 피더냐? 헌데! 어찌 너희는 사람을 함부로 보느냐? 어찌 사람을 재물로 보는 것이야! 어찌 사람 위에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못된 것들 같으니!”
우반동에서 유형원은 노비세습 폐지에 대한 방안을 본격적으로 고민했다. 그때부터 그는 노비세습을 반대하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적어둔 초안을 바탕으로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노비제가 가진 비인도적이며 비효율적인 특징을 해소해야 한다. 이들을 공전제하의 소농으로 편입하여 국가의 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노동력을 충당할 인물들로는 고공이 좋다. 고공은 노비에 비해 신역에 얽매여있지 않는다. 고공은 여러 측면에서 더 효율적인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덕구는 유형원의 말벗이 되었다. 서원에 올 때마다 손에 뭔가를 들고 왔다.
“반계어르신. 저희 집 닭이 알을 낳았어요. 맛 좀 보세요.”
어떤 날은 곡식 한 되를 놓고 갔다. 또 어떤 날은 삶은 옥수수 몇 개를 놓고 갔다. 감자나 고구마를 놓고 가는 날도 있었다. 덕구는 조용히 와서 반계수록 초고를 집필하는 모습을 툇마루에서 어깨너머로 구경했다.
어느 날 덕구가 유형원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 그 두꺼운 책은 왜 골치 아프게 만날 쓰세요?”
그때 유형원이 덕구에게 대답했다.
“허허허. 할 말이 많아서……. 이 시대가 나로 하여금 자꾸 뭔가를 쓰게 만드는구나.”
알 듯 모를 듯한 그 말에 덕구가 다시 물었다.
“할 말이 많으세요? 누구……한테요?”
“우리 후손들한테…….”
“후손이요? 반계어르신, 거기에…… 미천한 저도 포함되나요?”
“미천하다니? 사람은 귀천이 따로 없다. 허허허. 이 책은 너를 위해 쓰는 거란다…… 너, 그리고 수백 년 후의 후손들을 위해.”
덕구가 서원 앞에 펼쳐진 드넓은 곡창지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르신. 훗날…… 그러니까 수백 년 후에 태어날 후손들 말이에요. 그들도…… 이곳에서 살아가게 될까요?”
“그렇고말고. 우리처럼 물소리도 듣고, 새소리도 듣고, 한가한 날에는 저기 오솔길도 걸으며 살아갈게다. 오늘 너와 나처럼…… 그들은 아주 평등할 게다. 어떠냐? 행복한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느냐? 나는 벌써 보이는구나. 허허허.”
고개를 끄덕이던 덕구가 천천히 일어났다.
“반계어르신, 저희 어머니가 어르신 안색이 많이 수척해지셨다고 진지 잘 챙겨 드시래요. 저 이만 가볼게요.”
덕구가 툇마루에 삶은 고구마가 담긴 바가지를 놓고 일어났다. 노을 속에 활처럼 굽은 들길을 걸어가는 덕구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유형원은 마루에 뒷짐 지고 서서 논길로 멀어져가는 덕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가 혼잣말을 했다.
“반계어르신. 저희 집 닭이 알을 낳았어요. 맛 좀 보세요.”
어떤 날은 곡식 한 되를 놓고 갔다. 또 어떤 날은 삶은 옥수수 몇 개를 놓고 갔다. 감자나 고구마를 놓고 가는 날도 있었다. 덕구는 조용히 와서 반계수록 초고를 집필하는 모습을 툇마루에서 어깨너머로 구경했다.
어느 날 덕구가 유형원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 그 두꺼운 책은 왜 골치 아프게 만날 쓰세요?”
그때 유형원이 덕구에게 대답했다.
“허허허. 할 말이 많아서……. 이 시대가 나로 하여금 자꾸 뭔가를 쓰게 만드는구나.”
알 듯 모를 듯한 그 말에 덕구가 다시 물었다.
“할 말이 많으세요? 누구……한테요?”
“우리 후손들한테…….”
“후손이요? 반계어르신, 거기에…… 미천한 저도 포함되나요?”
“미천하다니? 사람은 귀천이 따로 없다. 허허허. 이 책은 너를 위해 쓰는 거란다…… 너, 그리고 수백 년 후의 후손들을 위해.”
덕구가 서원 앞에 펼쳐진 드넓은 곡창지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르신. 훗날…… 그러니까 수백 년 후에 태어날 후손들 말이에요. 그들도…… 이곳에서 살아가게 될까요?”
“그렇고말고. 우리처럼 물소리도 듣고, 새소리도 듣고, 한가한 날에는 저기 오솔길도 걸으며 살아갈게다. 오늘 너와 나처럼…… 그들은 아주 평등할 게다. 어떠냐? 행복한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느냐? 나는 벌써 보이는구나. 허허허.”
고개를 끄덕이던 덕구가 천천히 일어났다.
“반계어르신, 저희 어머니가 어르신 안색이 많이 수척해지셨다고 진지 잘 챙겨 드시래요. 저 이만 가볼게요.”
덕구가 툇마루에 삶은 고구마가 담긴 바가지를 놓고 일어났다. 노을 속에 활처럼 굽은 들길을 걸어가는 덕구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유형원은 마루에 뒷짐 지고 서서 논길로 멀어져가는 덕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가 혼잣말을 했다.
“덕구야……. 우리 후손들은, 너처럼 부모와 생이별하며 살아선 안 된다. 동물처럼 끌려 다니고 매 맞고 물건처럼 천대받는 세상은 절대 없어야 해.”
유형원은 덕구를 보며 하루빨리 새로운 세상이 오길 간절히 바랐다. 아득히 멀어지는 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형원. 착한 덕구의 뒷모습이 수채화물감처럼 유형원의 눈에서 물들어갔다.
유형원은 덕구를 보며 하루빨리 새로운 세상이 오길 간절히 바랐다. 아득히 멀어지는 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형원. 착한 덕구의 뒷모습이 수채화물감처럼 유형원의 눈에서 물들어갔다.
가을이 깊어갔다.
황금들판에 오곡이 무르익더니 어느 새 추수도 끝나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가웠다. 확 트인 우반동 들녘이 반계서원에서 훤히 내려다보였다. 덕구는 며칠 동안 오지 않았다.
유형원은 밤새, 등잔불 아래에서 반계수록 초록을 완성했다. 탈고를 마치자 새벽닭이 홰를 쳤다. 제법 싸늘해진 바람이 문풍지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따금 기름 졸아드는 소리가 자글자글 들렸고 등잔불이 춤을 추었다.
천천히 붓을 내려놓은 유형원이 여명이 밝아오는 장지문을 활짝 열었다. 새벽 푸른빛이 방안으로 들어와 마음까지 흠뻑 적셨다. 그의 동공 속으로 불덩이 같은 태양이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굴러왔다. 부안과 우반동 평야지대 들녘을 내다보며 유형원은 생각했다.
‘아침이구나……. 또 아침이 왔어. 먼 훗날 수백 년 뒤, 이곳에는 어떤 아침이 올까……?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그때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은, 오래전 내가…… 여기에 왔다 간 것을 기억해줄까? 그들이 수백 년 후에 듣고 있을 새 소리, 바람소리, 꽃향기를…… 오늘 나도 여기서 듣고 보고 느끼다 갔다는 것을 알아줄까……? 새벽이 있어야 아침이 오듯, 나는 우리 후손들의 새벽이 되어야한다. 그들의 새벽이 되어야 해.’
유형원은 수척해진 손으로 반계수록을 오래 쓰다듬었다.
그가 충혈 된 눈을 감고 곤한 몸을 돌아누웠다. 그의 꿈속에서 세상은 귀천이 따로 없고 양반도 천민도 없었다. 사람들 모두가 함께 꽃밭을 거닐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웃고 있었다.
황금들판에 오곡이 무르익더니 어느 새 추수도 끝나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가웠다. 확 트인 우반동 들녘이 반계서원에서 훤히 내려다보였다. 덕구는 며칠 동안 오지 않았다.
유형원은 밤새, 등잔불 아래에서 반계수록 초록을 완성했다. 탈고를 마치자 새벽닭이 홰를 쳤다. 제법 싸늘해진 바람이 문풍지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따금 기름 졸아드는 소리가 자글자글 들렸고 등잔불이 춤을 추었다.
천천히 붓을 내려놓은 유형원이 여명이 밝아오는 장지문을 활짝 열었다. 새벽 푸른빛이 방안으로 들어와 마음까지 흠뻑 적셨다. 그의 동공 속으로 불덩이 같은 태양이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굴러왔다. 부안과 우반동 평야지대 들녘을 내다보며 유형원은 생각했다.
‘아침이구나……. 또 아침이 왔어. 먼 훗날 수백 년 뒤, 이곳에는 어떤 아침이 올까……?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그때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은, 오래전 내가…… 여기에 왔다 간 것을 기억해줄까? 그들이 수백 년 후에 듣고 있을 새 소리, 바람소리, 꽃향기를…… 오늘 나도 여기서 듣고 보고 느끼다 갔다는 것을 알아줄까……? 새벽이 있어야 아침이 오듯, 나는 우리 후손들의 새벽이 되어야한다. 그들의 새벽이 되어야 해.’
유형원은 수척해진 손으로 반계수록을 오래 쓰다듬었다.
그가 충혈 된 눈을 감고 곤한 몸을 돌아누웠다. 그의 꿈속에서 세상은 귀천이 따로 없고 양반도 천민도 없었다. 사람들 모두가 함께 꽃밭을 거닐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웃고 있었다.
‘꼬끼오! 고고고…….’
먼데서 새벽닭이 한 번 더 힘차게 울었다.
먼데서 새벽닭이 한 번 더 힘차게 울었다.
스토리원고 | | | 김명희 작가 |
연구원고 | | | 심희곤(고려대) |
일러스트 | | | 컬처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