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 유수원_귀가 아닌 글로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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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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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아닌 글로 듣다 –농암 유수원-
옥빛 나비 한 마리
서기 1755년(영조 31년) 5월 25일, 유수원은 형틀에 묶여 있었다. 이미 곤장 스무 대를 맞고 난 뒤였다. 임금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죄인을 심문하던 위관(委官, 재판장)이 형틀에 엎드려 있는 유수원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찍어 누르면서 물었다.
“이제 순순히 털어놓겠느냐? 너는 예전에 전하로부터 지극한 성은을 입은 몸이다. 그런 네가 감히 역적모의를 하다니!”
곤장 스무 대에 정신을 잃은 유수원은 그제야 피범벅이 된 엉덩이를 비틀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곤장을 들고 있던 사령(使令, 조선시대 관아의 심부름꾼)이 위관에게 소리쳤다.
“허허, 이놈은 귀머거리올시다! 웬만큼 안 내지르면 먹통입지요! 하하하하.”
사령은 피 묻은 곤장 끝으로 유수원의 귀를 가리키며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때 겨우 고개를 든 유수원이 위관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저 먼 곳에 앉아 있는 임금을 향하여 눈길을 던졌다. 이심전심일까. 마침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형틀이 놓여 있는 내사복(內司僕, 조선시대 임금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던 관아) 마당으로 걸어 내려왔다. 위관과 사령이 허리를 굽혔다. 임금이 말했다.
“이 자는 스스로 농암(聾巖)이라 불리기를 좋아하던 위인으로 듣지를 못하느니라. 내 예전에도 이 자와 필담을 나눈 적이 있었느니라. 위관은 붓과 종이를 대령하렷다.”
잠시 뒤 위관이 종이와 붓을 가져오자 임금이 죄인을 향하여 물었다.
“너는 오래 전에 우서(迂書)라는 훌륭한 책을 지은 위인으로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역모를 꾸몄느냐? 임금인 나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히려 했느냐? 이실직고하렷다!”
위관이 임금의 심문을 글로 적어 유수원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유수원의 두 눈에서 번쩍, 하고 광채가 일었다.
“역모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저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과 어울려 현실을 한탄하고 임금을 비방하며 여러 간신들을 욕한 적한 적은 많습니다.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 친구들과 어울릴 때마다 험한 말과 악담으로 임금과 신하들을 헐뜯었습니다. 신의 죄가 하늘을 덮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신의 어지러운 말과 비방은 나라를 위한 충정이었지 역모를 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전하, 저는 죽어 마땅하오나 진실만은 믿어주시옵소서!”
임금이 다시 추궁하고 위관이 글로 쓰서 유수원에게 들이밀었다.
“네놈이 역모를 계획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만, 마음속으로는 역모를 꿈꾸고 있었다는 말 아니더냐? 반역의 마음을 품고 살았다? 진정 그렇더냐?”
임금의 입에서 침방울이 튀어 형틀 위로 떨어졌다. 유수원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임금의 침방울이 한데 뒤섞여 새로운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신은 살기를 구걸하지 않겠사옵니다. 진실만을 전할 뿐이옵니다!”
임금이 주먹을 말아지며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어라.”
임금이 내사복 마당을 걸어 나가는 동안 유수원은 피 묻은 형틀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살아온 60년 세월이 새삼 선명하게 다가와서는 멀어져갔다. 순간 위관의 높은 목소리가 유수원의 등 위로 지나갔다.
“뭐하느냐! 곤장 열 대를 더 치거라! 곤장을 높게 들어서 세차게 내리쳐야한다!”
봄 햇살에 얼굴이 시커멓게 탄 사령은 한쪽 발을 곤장과 함께 들어 올렸다가 힘껏 내리꽂았다. 유수원이 비명을 참느라 어금니를 깨물었다. 곤장이 지나간 유수원의 엉덩이 위로 따스한 봄 햇살이 내려앉았다. 옥빛 나비 한 마리가 엉덩이 위를 맴돌다가 임금이 앉아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임금은 형틀이 놓인 내사복 뜰을 향해 앉아 수정과를 마시다가 눈썹 가까이로 날아오는 옥빛 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고놈 참 곱기도 하구나. 임금은 눈앞을 맴도는 나비와 저 만큼 앞에 놓인 형틀 위의 유수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하느냐, 빨리 치지 않고! 사정없이 내리치거라!”
사령의 검은 얼굴 위로 땀이 흘러내렸다. 사령은 곤장 수를 헤아리다가 잊어먹었다. 우물쭈물하는 그를 향해 위관이 대신 수를 헤아려주었다.
“이제 스물세 대 쳤느니라. 계속 치거라.”
사령이 곤장을 치켜들었을 때 유수원은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뒤였다. 헤어진 엉덩이 옷자락 사이로 찢어진 살점이 핏물과 함께 드러났다. 유수원의 나이 예순두 살 되던 어느 봄날 오후의 일이었다.
곤장 스무 대에 정신을 잃은 유수원은 그제야 피범벅이 된 엉덩이를 비틀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곤장을 들고 있던 사령(使令, 조선시대 관아의 심부름꾼)이 위관에게 소리쳤다.
“허허, 이놈은 귀머거리올시다! 웬만큼 안 내지르면 먹통입지요! 하하하하.”
사령은 피 묻은 곤장 끝으로 유수원의 귀를 가리키며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때 겨우 고개를 든 유수원이 위관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저 먼 곳에 앉아 있는 임금을 향하여 눈길을 던졌다. 이심전심일까. 마침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형틀이 놓여 있는 내사복(內司僕, 조선시대 임금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던 관아) 마당으로 걸어 내려왔다. 위관과 사령이 허리를 굽혔다. 임금이 말했다.
“이 자는 스스로 농암(聾巖)이라 불리기를 좋아하던 위인으로 듣지를 못하느니라. 내 예전에도 이 자와 필담을 나눈 적이 있었느니라. 위관은 붓과 종이를 대령하렷다.”
잠시 뒤 위관이 종이와 붓을 가져오자 임금이 죄인을 향하여 물었다.
“너는 오래 전에 우서(迂書)라는 훌륭한 책을 지은 위인으로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역모를 꾸몄느냐? 임금인 나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누구를 앉히려 했느냐? 이실직고하렷다!”
위관이 임금의 심문을 글로 적어 유수원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유수원의 두 눈에서 번쩍, 하고 광채가 일었다.
“역모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저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과 어울려 현실을 한탄하고 임금을 비방하며 여러 간신들을 욕한 적한 적은 많습니다.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 친구들과 어울릴 때마다 험한 말과 악담으로 임금과 신하들을 헐뜯었습니다. 신의 죄가 하늘을 덮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신의 어지러운 말과 비방은 나라를 위한 충정이었지 역모를 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전하, 저는 죽어 마땅하오나 진실만은 믿어주시옵소서!”
임금이 다시 추궁하고 위관이 글로 쓰서 유수원에게 들이밀었다.
“네놈이 역모를 계획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만, 마음속으로는 역모를 꿈꾸고 있었다는 말 아니더냐? 반역의 마음을 품고 살았다? 진정 그렇더냐?”
임금의 입에서 침방울이 튀어 형틀 위로 떨어졌다. 유수원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임금의 침방울이 한데 뒤섞여 새로운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신은 살기를 구걸하지 않겠사옵니다. 진실만을 전할 뿐이옵니다!”
임금이 주먹을 말아지며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어라.”
임금이 내사복 마당을 걸어 나가는 동안 유수원은 피 묻은 형틀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살아온 60년 세월이 새삼 선명하게 다가와서는 멀어져갔다. 순간 위관의 높은 목소리가 유수원의 등 위로 지나갔다.
“뭐하느냐! 곤장 열 대를 더 치거라! 곤장을 높게 들어서 세차게 내리쳐야한다!”
봄 햇살에 얼굴이 시커멓게 탄 사령은 한쪽 발을 곤장과 함께 들어 올렸다가 힘껏 내리꽂았다. 유수원이 비명을 참느라 어금니를 깨물었다. 곤장이 지나간 유수원의 엉덩이 위로 따스한 봄 햇살이 내려앉았다. 옥빛 나비 한 마리가 엉덩이 위를 맴돌다가 임금이 앉아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임금은 형틀이 놓인 내사복 뜰을 향해 앉아 수정과를 마시다가 눈썹 가까이로 날아오는 옥빛 나비 한 마리를 보았다. 고놈 참 곱기도 하구나. 임금은 눈앞을 맴도는 나비와 저 만큼 앞에 놓인 형틀 위의 유수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하느냐, 빨리 치지 않고! 사정없이 내리치거라!”
사령의 검은 얼굴 위로 땀이 흘러내렸다. 사령은 곤장 수를 헤아리다가 잊어먹었다. 우물쭈물하는 그를 향해 위관이 대신 수를 헤아려주었다.
“이제 스물세 대 쳤느니라. 계속 치거라.”
사령이 곤장을 치켜들었을 때 유수원은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뒤였다. 헤어진 엉덩이 옷자락 사이로 찢어진 살점이 핏물과 함께 드러났다. 유수원의 나이 예순두 살 되던 어느 봄날 오후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유언
유수원은 1694년(숙종 20년) 충주목(현재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비록 시골 출신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문화유씨 명문가였다. 하지만 유수원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름 모를 병으로 몸져누웠다. 아버지는 눈을 감기 전에 어린 유수원을 불러 앉혔다.
“수원아, 명심하거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양반가문이었다. 세종대왕 때 청백리(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곧고 깨끗한 관리) 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유관(柳寬)이란 분은 너의 먼 조상이란다. 그분은 우의정까지 지낸 정승이었지만 베옷에 짚신으로 검소하게 사신 분이다. 높은 벼슬을 사실 때도 초가에 사셨는데 비가 오면 물이 새 우산을 받쳐 들고 비를 피하곤 했단다. 그리고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비를 어떻게 피하겠소?’ 하며 가난한 백성들을 걱정하셨단다. 그분께서 돌아가시자 세종대왕께서 친히 흰옷과 흰 양산을 쓰시고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셨지. 수원이 너도 이처럼 가난한 백성들을 생각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어린 유수원의 손을 끌어 잡고 힘들게 숨을 이어갔다. 유수원은 눈물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깨물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뜨거운 눈물이 아버지의 야윈 손등 위로 굴러 떨어졌다. 아버지는 다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죽거든 수원이 너는 엄마랑 함께 한양으로 가 살거라. 내가 미리 큰집에 부탁해 뒀단다. 네 큰할아버지께서 영상(영의정)까지 지낸 인물 아니더냐. 큰집 옆에 조그마한 초가 한 칸을 마련해 두었으니 거기 가 살면 도움이 될 게야. 모름지기 사대부로 태어나서 과거는 봐야하지 않겠느냐. 공부하는 데는 여기보다 한양이 나를 게야.”
그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어린 유수원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한양으로 옮겨간 유수원은 홀어머니 밑에서 밤을 꼬박 세워가며 공부를 했다. 덕분에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되던 1714년(숙종 40년)에 진사시(진사를 뽑는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4년 뒤인 1718년(숙종 44년)에는 마침내 문과(조선시대 고급 관리를 뽑는 과거)에도 합격했다. 유수원은 홀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를 끌어안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충주 고향 마을을 찾은 유수원은 아버지의 산소에 술을 따르면서 오랜만에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었다.
‘아버지, 저 유수원,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나라의 당당한 사대부로 살아가겠습니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관리가 되겠습니다. 옛날 청백리로 살다 가신 조상님께 누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 아버지.’
“수원아, 명심하거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양반가문이었다. 세종대왕 때 청백리(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곧고 깨끗한 관리) 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유관(柳寬)이란 분은 너의 먼 조상이란다. 그분은 우의정까지 지낸 정승이었지만 베옷에 짚신으로 검소하게 사신 분이다. 높은 벼슬을 사실 때도 초가에 사셨는데 비가 오면 물이 새 우산을 받쳐 들고 비를 피하곤 했단다. 그리고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비를 어떻게 피하겠소?’ 하며 가난한 백성들을 걱정하셨단다. 그분께서 돌아가시자 세종대왕께서 친히 흰옷과 흰 양산을 쓰시고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셨지. 수원이 너도 이처럼 가난한 백성들을 생각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어린 유수원의 손을 끌어 잡고 힘들게 숨을 이어갔다. 유수원은 눈물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깨물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뜨거운 눈물이 아버지의 야윈 손등 위로 굴러 떨어졌다. 아버지는 다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죽거든 수원이 너는 엄마랑 함께 한양으로 가 살거라. 내가 미리 큰집에 부탁해 뒀단다. 네 큰할아버지께서 영상(영의정)까지 지낸 인물 아니더냐. 큰집 옆에 조그마한 초가 한 칸을 마련해 두었으니 거기 가 살면 도움이 될 게야. 모름지기 사대부로 태어나서 과거는 봐야하지 않겠느냐. 공부하는 데는 여기보다 한양이 나를 게야.”
그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어린 유수원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한양으로 옮겨간 유수원은 홀어머니 밑에서 밤을 꼬박 세워가며 공부를 했다. 덕분에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되던 1714년(숙종 40년)에 진사시(진사를 뽑는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4년 뒤인 1718년(숙종 44년)에는 마침내 문과(조선시대 고급 관리를 뽑는 과거)에도 합격했다. 유수원은 홀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를 끌어안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충주 고향 마을을 찾은 유수원은 아버지의 산소에 술을 따르면서 오랜만에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었다.
‘아버지, 저 유수원,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나라의 당당한 사대부로 살아가겠습니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관리가 되겠습니다. 옛날 청백리로 살다 가신 조상님께 누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 아버지.’
책을 쓰다
서기 1722년(경종 2년) 유수원은 사간원(司諫院,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했던 기관) 정언(正言, 정6품)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때였다. 빠른 출세였다. 하지만 그 당시 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당파 싸움에 희생이 된 유수원은 이듬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낭천(지금의 화천군)의 현감(縣監, 종6품)으로 보내졌다. 직급이 한 등급 떨어진 자리였다. 사간원 정언으로 일하던 그가 왕에게 상소를 올려 신하들의 실정을 맹렬하게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적들은 유수원을 한양에서 먼 지방 관리로 좌천시켰던 것이다.
“유수원이란 자는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고 행동이 가벼운 자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유수원을 파직시켜 주시옵소서, 전하!”
유수원은 강원도 산골로 내려가며 지난 날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가난한 백성들을 생각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유수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세상일이 만만하지가 않았다.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그런 유수원에게 어느 날부턴가 이명이 찾아왔다. 귓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없는데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계속 울려왔다. 그러더니 듣는 것도 차츰 어렵게 되었다. 시골 의원을 불러다가 물어봐도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글쎄올시다, 나리.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랏일을 너무 걱정하셔서 신경쇠약에 걸린 건 아닌지…… 마음을 편히 하시면 낫지 않을까요?”
유수원은 그때부터 결심을 했다. 이 나라의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 책을 쓰자. 생각나는 대로 꾸준히 적어두자.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내 제안이 임금과 조정에 받아들여져서 이 나라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제목은 우서(迂書)라고 하자. ‘멀 우’에 ‘책 서.’ 멀고 아득해서 언제 다 써질지, 언제 책속의 내용들이 실현될지 모르는 책. 우서.
유수원이 강원도 낭천 현감으로 내려간 지 1년 뒤에 임금(경종)이 죽고 새로운 임금(영조)이 즉위했다. 바로 유수원의 우서를 읽고 그를 궁궐로 불러 필담을 나눈 임금이었다. 그리고 먼 훗날 늙은 유수원을 역모 죄로 몰아 사형에 처한 조선 제 21대 임금이었다. 유수원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까지 뒤주에 가둬 죽인 무서운 임금이었다.
임금은 유수원의 정적들인 노론(老論,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하나)에 의해 왕이 되었기에 노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썼지만 한계가 있었다. 유수원이 속한 당은 소론(少論, 노론의 상대당파)이라 왕이 아무리 유수원을 아낀다고 해도 반대파인 노론 대신들에 의해 견제받기 일쑤였다. 결국 유수원은 35세 때 임명된 사헌부(司憲府, 관리들을 감찰했던 관청) 지평(持平, 정5품) 자리에 잠깐 있다가 9년이란 세월을 벼슬 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다시 관직을 받은 것이 사헌부 지평이었다. 결국 9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벼슬살이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해 가을에 충청도 단양 군수(郡守, 종4품)로 내려갔다. 유수원은 그곳에서 벼슬살이하면서 자신의 역저(온 힘을 들여 지은 훌륭한 책)인 우서를 마무리했다. 단양까지 따라 내려와 함께 사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책을 보여주며 유수원은 눈물을 흘렸다.
“유수원이란 자는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고 행동이 가벼운 자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유수원을 파직시켜 주시옵소서, 전하!”
유수원은 강원도 산골로 내려가며 지난 날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렸다. ‘가난한 백성들을 생각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유수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세상일이 만만하지가 않았다.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그런 유수원에게 어느 날부턴가 이명이 찾아왔다. 귓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없는데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계속 울려왔다. 그러더니 듣는 것도 차츰 어렵게 되었다. 시골 의원을 불러다가 물어봐도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글쎄올시다, 나리.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랏일을 너무 걱정하셔서 신경쇠약에 걸린 건 아닌지…… 마음을 편히 하시면 낫지 않을까요?”
유수원은 그때부터 결심을 했다. 이 나라의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 책을 쓰자. 생각나는 대로 꾸준히 적어두자.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내 제안이 임금과 조정에 받아들여져서 이 나라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제목은 우서(迂書)라고 하자. ‘멀 우’에 ‘책 서.’ 멀고 아득해서 언제 다 써질지, 언제 책속의 내용들이 실현될지 모르는 책. 우서.
유수원이 강원도 낭천 현감으로 내려간 지 1년 뒤에 임금(경종)이 죽고 새로운 임금(영조)이 즉위했다. 바로 유수원의 우서를 읽고 그를 궁궐로 불러 필담을 나눈 임금이었다. 그리고 먼 훗날 늙은 유수원을 역모 죄로 몰아 사형에 처한 조선 제 21대 임금이었다. 유수원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까지 뒤주에 가둬 죽인 무서운 임금이었다.
임금은 유수원의 정적들인 노론(老論,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하나)에 의해 왕이 되었기에 노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썼지만 한계가 있었다. 유수원이 속한 당은 소론(少論, 노론의 상대당파)이라 왕이 아무리 유수원을 아낀다고 해도 반대파인 노론 대신들에 의해 견제받기 일쑤였다. 결국 유수원은 35세 때 임명된 사헌부(司憲府, 관리들을 감찰했던 관청) 지평(持平, 정5품) 자리에 잠깐 있다가 9년이란 세월을 벼슬 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다시 관직을 받은 것이 사헌부 지평이었다. 결국 9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벼슬살이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해 가을에 충청도 단양 군수(郡守, 종4품)로 내려갔다. 유수원은 그곳에서 벼슬살이하면서 자신의 역저(온 힘을 들여 지은 훌륭한 책)인 우서를 마무리했다. 단양까지 따라 내려와 함께 사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책을 보여주며 유수원은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벼슬살이 십 년 만에 직급은 겨우 한 등급 올랐지만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한가로이 지내는 덕분에 책을 지을 수가 있었으니까요, 어머니.”
어머니는 유수원이 보자기를 풀어 보여준 몇 권의 책을 품에 안으며 눈물을 훔쳤다.
“이 책에 다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 어떻게 하면 우리 조선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게 말입니다.”
그 무렵, 유수원은 귀가 더욱 멀어 가까이서 어머니가 하는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귀에 자신의 입을 대고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슴에 응어리 진 것들이 좀 풀려나갔다면 좋은 일이지. 언젠가는 네 마음을 세상이 알아줄 날이 올 거야. 용기를 내거라.”
어머니는 유수원이 보자기를 풀어 보여준 몇 권의 책을 품에 안으며 눈물을 훔쳤다.
“이 책에 다 들어 있습니다, 어머니. 어떻게 하면 우리 조선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게 말입니다.”
그 무렵, 유수원은 귀가 더욱 멀어 가까이서 어머니가 하는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귀에 자신의 입을 대고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슴에 응어리 진 것들이 좀 풀려나갔다면 좋은 일이지. 언젠가는 네 마음을 세상이 알아줄 날이 올 거야. 용기를 내거라.”
귀머거리, 임금을 만나다
그런 어느 날, 임금은 조정의 여러 신하들에게 인재를 추천하라고 일렀다. 그러자 한 신하가 유수원을 추천했다.
“유수원이라는 자는 비록 귀는 먹었지만 문장이 아주 훌륭합니다. 책을 하나 지었는데 제목은 우서라고 합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방책을 논한 책입니다. 유수원처럼 유능한 인재가 헛되이 늙어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가 거들고 나섰다.
“신도 그 책을 보았는데 주장과 논리가 매우 참신했습니다. 식견이 높고 뜻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전하.”
이처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유수원의 사람됨과 그가 지은 책을 칭찬하자 임금은 승정원(承政院,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기관)에 명령을 내려 ‘우서’를 구해 올리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책은 대체로 옛 위인들의 글을 뽑아서 멋스럽게 다듬는 수준에 불과한데 유수원은 남다른 데가 있구나.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만 꾸밈없이 썼으니 참으로 귀한 책이 아닐 수가 없구나!”
우서를 다 읽은 임금은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유수원을 단양에서 한양으로 불러올려 새로운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몇 년 뒤 임금은 유수원을 궁궐로 직접 불렀다. 유수원의 나이 48세 때였다. 유수원은 자신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입궐을 사양했지만 임금은 기어코 그를 대궐로 불러들였다.
“유수원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
“집이 멀어 아직 오질 못했습니다.”
“신문(新門, 서대문) 밖에 있는가?”
“서소문 밖에 있습니다.”
얼마 뒤 유수원은 숨을 헐떡거리며 마침내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 앞마당에 도착했다. 십리 길을 뛰어온 탓에 그의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유수원이 막 도착하였사오나 먼 길을 달려오느라 숨이 몹시 가쁩니다. 잠시 쉰 후에 아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그러자 임금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숨이 가쁜가? 그럴 테지. 조금 기운을 차린 뒤에 들라 일러라.”
유수원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정신을 가지런히 수습한 뒤에 임금 앞으로 나아가 엎드렸다.
“내 일찍이 네가 지은 우서라는 책은 읽어보았느니라.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이 등 따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적어둬서 퍽 유익하게 읽었느니라. 내 오늘 너를 부른 것은…… 얼마 전에 네가 지어올린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 관직에 있는 햇수에 따라 품계가 올라가는 제도를 논한 상소문)에 대해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망설이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거라.”
임금의 말을 신하가 글로 적어 유수원에게 보여주었다. 유수원은 금세 글을 읽고는 큰소리로 임금에게 고했다.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관제(국가의 행정 조직, 권한 등을 정한 규정)는 주나라 관제의 좋은 점을 본받은 명나라 관제가 으뜸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청나라 사람들이 비록 이적(夷狄, 오랑캐)라고들 하지만 이들이 전적으로 명나라 관제를 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세운지 백 년이 되도록 별다른 폐단이 없사옵니다.”
“유수원이라는 자는 비록 귀는 먹었지만 문장이 아주 훌륭합니다. 책을 하나 지었는데 제목은 우서라고 합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여러 가지 방책을 논한 책입니다. 유수원처럼 유능한 인재가 헛되이 늙어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가 거들고 나섰다.
“신도 그 책을 보았는데 주장과 논리가 매우 참신했습니다. 식견이 높고 뜻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전하.”
이처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유수원의 사람됨과 그가 지은 책을 칭찬하자 임금은 승정원(承政院,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기관)에 명령을 내려 ‘우서’를 구해 올리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책은 대체로 옛 위인들의 글을 뽑아서 멋스럽게 다듬는 수준에 불과한데 유수원은 남다른 데가 있구나.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만 꾸밈없이 썼으니 참으로 귀한 책이 아닐 수가 없구나!”
우서를 다 읽은 임금은 수준을 높이 평가하고 유수원을 단양에서 한양으로 불러올려 새로운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몇 년 뒤 임금은 유수원을 궁궐로 직접 불렀다. 유수원의 나이 48세 때였다. 유수원은 자신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입궐을 사양했지만 임금은 기어코 그를 대궐로 불러들였다.
“유수원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
“집이 멀어 아직 오질 못했습니다.”
“신문(新門, 서대문) 밖에 있는가?”
“서소문 밖에 있습니다.”
얼마 뒤 유수원은 숨을 헐떡거리며 마침내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 앞마당에 도착했다. 십리 길을 뛰어온 탓에 그의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유수원이 막 도착하였사오나 먼 길을 달려오느라 숨이 몹시 가쁩니다. 잠시 쉰 후에 아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
그러자 임금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숨이 가쁜가? 그럴 테지. 조금 기운을 차린 뒤에 들라 일러라.”
유수원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정신을 가지런히 수습한 뒤에 임금 앞으로 나아가 엎드렸다.
“내 일찍이 네가 지은 우서라는 책은 읽어보았느니라.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이 등 따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적어둬서 퍽 유익하게 읽었느니라. 내 오늘 너를 부른 것은…… 얼마 전에 네가 지어올린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 관직에 있는 햇수에 따라 품계가 올라가는 제도를 논한 상소문)에 대해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망설이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거라.”
임금의 말을 신하가 글로 적어 유수원에게 보여주었다. 유수원은 금세 글을 읽고는 큰소리로 임금에게 고했다.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관제(국가의 행정 조직, 권한 등을 정한 규정)는 주나라 관제의 좋은 점을 본받은 명나라 관제가 으뜸이라 생각됩니다. 지금 청나라 사람들이 비록 이적(夷狄, 오랑캐)라고들 하지만 이들이 전적으로 명나라 관제를 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세운지 백 년이 되도록 별다른 폐단이 없사옵니다.”
임금은 유수원의 유난히 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임금은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네가 주장하는 서승법(序陞法, 햇수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지는 관제법) 대로 한다면 동중서(중국 한라의 대학자)나 가의(최연소 박사가 된 한나라의 학자) 같은 인재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억울한 측면도 있지 않겠느냐?”
신하가 임금의 말을 받아 적어 유수원에게 들이밀자 유수원이 대답했다.
“동중서나 가의 같은 인물은 세상에 많지 않습니다. 간혹 있다고 해도 서승법대로 한다면 점차 승진해서 15년이면 당상관(堂上官, 정3품 벼슬)에 오를 수 있습니다. 비록 동중서나 가의 같은 천재 있다고 해도 이 서승법대로 한다면 그리 억울할 것이 없사옵니다, 전하.”
임금의 말을 또 신하가 적었다.
“가령 정자(正字, 홍문관의 정9품 관직)를 선발할 때나 또 고과(인사고과)를 매겨 서승(승진)할 때 과연 사사로운 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라에 기강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교묘한 폐단이 생길 수 있느니라.”
임금의 글을 보고 유수원이 대답했다.
“명나라에서는 거자(擧子, 과거 응시자)들을 황제가 직접 시험하였는데, 그 제도가 극도로 엄격하고 주도면밀하였다고 합니다. 또 정자를 뽑을 때도 황제가 직접 시험 문제를 내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이 제도에 의거하여 정자를 뽑는다면 어찌 사사로운 정이 개입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임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네 말은 가상하구나.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가 있다고 해도 기강이 바로 서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라. 오늘날 관제에 있어서 폐단을 없애는 길은 먼저 기강을 세우고, 그 다음은 공도(公道, 공평하고 바른 도리)를 따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네 생각은 어떠한가?”
임금의 글을 읽은 유수원이 굽히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기강은 위엄이나 형벌로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기강을 세우고 공도를 넓히는 것은 바로 이 서승법 가운데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정자가 된지 3년 만에 수찬(修撰, 홍문관의 정6품 관직)이 되고, 수찬이 된지 3년 만에 교리(校理, 홍문관의 정5품 관직)가 되고, 교리가 된지 3년 만에 응교(應敎, 홍문관의 정4품 관직)로 승진합니다. 년차에 따라 서승하는 법이 예부터 있어온 것은 대체로 관원들이 마음 놓고 근신하며 열심히 일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유수원의 말에 임금이 비로소 웃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옳다!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묘당(의정부)에서 상의해 보겠노라.”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탕평(蕩平, 영조시대 때 당쟁을 없애기 위해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 정치를 추구하던 임금은 관제 개선을 위해 고심하던 차에 마침 유수원의 관제서승도설에 대해 필담을 나누었고, 이에 만족한 임금은 그해 3월, 홍문관 관원 선발제도부터 손을 보았던 것이다.
“네가 주장하는 서승법(序陞法, 햇수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지는 관제법) 대로 한다면 동중서(중국 한라의 대학자)나 가의(최연소 박사가 된 한나라의 학자) 같은 인재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억울한 측면도 있지 않겠느냐?”
신하가 임금의 말을 받아 적어 유수원에게 들이밀자 유수원이 대답했다.
“동중서나 가의 같은 인물은 세상에 많지 않습니다. 간혹 있다고 해도 서승법대로 한다면 점차 승진해서 15년이면 당상관(堂上官, 정3품 벼슬)에 오를 수 있습니다. 비록 동중서나 가의 같은 천재 있다고 해도 이 서승법대로 한다면 그리 억울할 것이 없사옵니다, 전하.”
임금의 말을 또 신하가 적었다.
“가령 정자(正字, 홍문관의 정9품 관직)를 선발할 때나 또 고과(인사고과)를 매겨 서승(승진)할 때 과연 사사로운 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라에 기강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교묘한 폐단이 생길 수 있느니라.”
임금의 글을 보고 유수원이 대답했다.
“명나라에서는 거자(擧子, 과거 응시자)들을 황제가 직접 시험하였는데, 그 제도가 극도로 엄격하고 주도면밀하였다고 합니다. 또 정자를 뽑을 때도 황제가 직접 시험 문제를 내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이 제도에 의거하여 정자를 뽑는다면 어찌 사사로운 정이 개입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임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네 말은 가상하구나.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가 있다고 해도 기강이 바로 서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라. 오늘날 관제에 있어서 폐단을 없애는 길은 먼저 기강을 세우고, 그 다음은 공도(公道, 공평하고 바른 도리)를 따르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네 생각은 어떠한가?”
임금의 글을 읽은 유수원이 굽히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기강은 위엄이나 형벌로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기강을 세우고 공도를 넓히는 것은 바로 이 서승법 가운데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정자가 된지 3년 만에 수찬(修撰, 홍문관의 정6품 관직)이 되고, 수찬이 된지 3년 만에 교리(校理, 홍문관의 정5품 관직)가 되고, 교리가 된지 3년 만에 응교(應敎, 홍문관의 정4품 관직)로 승진합니다. 년차에 따라 서승하는 법이 예부터 있어온 것은 대체로 관원들이 마음 놓고 근신하며 열심히 일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유수원의 말에 임금이 비로소 웃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옳다!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묘당(의정부)에서 상의해 보겠노라.”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탕평(蕩平, 영조시대 때 당쟁을 없애기 위해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 정치를 추구하던 임금은 관제 개선을 위해 고심하던 차에 마침 유수원의 관제서승도설에 대해 필담을 나누었고, 이에 만족한 임금은 그해 3월, 홍문관 관원 선발제도부터 손을 보았던 것이다.
나비, 날아가다
형틀에 묶인 늙은 유수원은 곤장 서른 대를 다 맞고 기절해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임금이 내사복 앞마당을 걸어 형틀 가까이로 다가왔다. 임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분한 마음에 두 주먹을 부르르 말아지었다. 임금이 무슨 말인가 하려하자 위관이 아까처럼 종이와 붓을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적을 준비를 했다. 눈치 빠른 사령이 찬물 세 바가지를 유수원의 얼굴 위로 세차게 쏟아 부었다. 그 바람에 유수원이 꿈틀거리며 겨우 얼굴을 치켜들었다. 임금이 말했다.
“지난날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인정전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눈 필담을 기억하느냐?”
위관이 임금의 말을 적어 내밀자 유수원이 눈물을 흘리며 짐승울음 소리를 냈다. 임금은 분을 참지 못해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질렀다.
“그런 네가 나를 배반하다니, 놀랍고도 분하구나! 충(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사대부로서 역적모의라니! 이 자를 감옥에 가뒀다가 내일 능지처참(陵遲處斬, 대역 죄인에 내리는 최고의 형벌)에 처하라!”
임금의 말을 글로 읽은 예순두 살의 늙은 선비 유수원은 그제야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고 피 묻은 형틀 위로 얼굴을 내려놓았다. 체념은 빠르게 찾아왔다. 이따금씩 뼈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통증이 그를 힘들게 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수원아, 그만하면 됐다. 편히 가거라. 네가 남겨 놓은 책이 있지 않느냐. 언젠가는 눈 밝은 이들이 네 글을 읽어보고 세상을…… 세상을 조금씩 아름답게…… 수원아…….’
다시 형틀 위에서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유수원은 잠시 뒤 소달구지에 실려 내사복 마당을 빠져나갔다. 오랫동안 피 묻은 형틀 주위를 맴돌던 옥빛 나비 한 마리가 유수원이 늘어져 누운 소달구지를 따라 나풀나풀 대궐을 빠져나갔다. 저만큼 멀리 떨어져 앉아 차가운 수정과를 마시던 임금의 눈이 나비를 쫓다말고 따스한 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임금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다음날 유수원은 반역죄로 서소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62살 때였다. 그리고 그의 처와 자식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지난날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인정전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눈 필담을 기억하느냐?”
위관이 임금의 말을 적어 내밀자 유수원이 눈물을 흘리며 짐승울음 소리를 냈다. 임금은 분을 참지 못해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질렀다.
“그런 네가 나를 배반하다니, 놀랍고도 분하구나! 충(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사대부로서 역적모의라니! 이 자를 감옥에 가뒀다가 내일 능지처참(陵遲處斬, 대역 죄인에 내리는 최고의 형벌)에 처하라!”
임금의 말을 글로 읽은 예순두 살의 늙은 선비 유수원은 그제야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고 피 묻은 형틀 위로 얼굴을 내려놓았다. 체념은 빠르게 찾아왔다. 이따금씩 뼈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통증이 그를 힘들게 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수원아, 그만하면 됐다. 편히 가거라. 네가 남겨 놓은 책이 있지 않느냐. 언젠가는 눈 밝은 이들이 네 글을 읽어보고 세상을…… 세상을 조금씩 아름답게…… 수원아…….’
다시 형틀 위에서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유수원은 잠시 뒤 소달구지에 실려 내사복 마당을 빠져나갔다. 오랫동안 피 묻은 형틀 주위를 맴돌던 옥빛 나비 한 마리가 유수원이 늘어져 누운 소달구지를 따라 나풀나풀 대궐을 빠져나갔다. 저만큼 멀리 떨어져 앉아 차가운 수정과를 마시던 임금의 눈이 나비를 쫓다말고 따스한 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임금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다음날 유수원은 반역죄로 서소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62살 때였다. 그리고 그의 처와 자식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스토리원고 | | | 채종인 작가 |
연구원고 | | | 심희곤(고려대) |
일러스트 | | | 컬처랩 |
참고문헌
『귀가 아닌 글로 듣다, 농암 유수원』. 심희곤. 2020. 10.
『꿈과 반역의 실학자 유수원』. 한영우. 지식산업사.
『귀가 아닌 글로 듣다, 농암 유수원』. 심희곤. 2020. 10.
『꿈과 반역의 실학자 유수원』. 한영우. 지식산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