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_홍수에서 건져 올린 실학-여유당 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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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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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에서 건져 올린 실학 –여유당전서-
다산 유적지
“아빠, 아빠가 예전에 했었다는 학원이 ‘다산 수학 학원’이었다면서? 왜 다산이란 이름을 넣었어 아빠?”
민식은 아빠랑 함께 북한강변을 드라이브하다가 문득 강변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 유적지’란 표지판을 보자 그렇게 넌지시 물었다. 운전대를 잡은 아빠는 아들 민식에게 잠깐 눈길을 던진 뒤 입을 열었다.
“아빠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었으니까.”
“……지금도?”
“응, 지금도!”
“그런데 왜 날 안 데리고 왔어?”
“……어딜?”
“여기, 다산 정약용 유적지 말이야.”
아들의 그 말에 아빠는 씩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사실 오늘 드라이브 목적지가 바로 여기야.”
아빠의 대답에 민식이 화답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와, 이 도로 이름도 다산로래! 다산로 747번길…….”
아빠는 핸들을 돌려 다산 유적지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까 그렇겠지. 서울에 충무로, 퇴계로, 세종로가 있듯이 말이야. 너도 학교에서 다산 선생에 대해서 배웠겠지?”
그러자 민식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학교에서는 조금 배우고 내가 독학을 했지. 책으로. 학교 도서관에 정약용 샘 책 엄청 많거든.”
민식은 여유롭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짜식, 여유만만한대?”
아빠가 민식의 어깨를 툭 치며 유적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민식이 큰소리로 되받았다.
“여유만만? 어, 그거, 정약용 샘 호인데! 여유당!”
아빠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맞아, 맞아. 우리 아들, 초등학교 5학년 치고는 꽤 유식한데? 하지만 그 여유(餘裕)하고는 좀 다른 여유(與猶)이긴 해.”
그러자 민식이 뒷짐을 지고 양반걸음을 걸으면서 으흠, 하고 기침을 했다.
“이렇게, 이렇게, 천천히, 여유 있게 걸으란 말이지?”
아들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에 아빠가 웃음을 지으며 앞서 걸어갔다. 그러자 뒤에서 아들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산, 여유당…… 또 있지 아빠? 호가 더 있을 텐데?”
그러는 아들의 지적 호기심에 만족해하며 아빠가 대답했다.
“있고말고. 정약용 샘 호는 스무 가지가 넘는대. 다산, 여유당, 삼미자, 열수, 죽란산인, 철마산인, 사암 등등…….”
“그중에서 많이 알려진 게 다산과 여유당이네 아빠?”
“그렇지. 다산은 강진에 유배 가서 살던 집 다산초당에서 유래된 이름이고, 여유당은 바로…… 저기…… 저기 있네! 샘께서 태어나서 자라고 돌아가신 곳.”
아빠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여유당(與猶堂)’이란 표지판에 눈에 들어왔다. 표지판 앞에 서 있던 민식이 아빠에게 물었다.
“여유당이 무슨 뜻이야 아빠? 설마 여유롭게 사는 집이란 뜻은 아니겠지?”
아빠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그런 여유가 아니고 음…… 좀 어려운 얘긴데……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좋은 글을 따와서 다산 샘께서 당호(堂號, 집 이름)로 사용하셨단다….”
민식은 아빠랑 함께 북한강변을 드라이브하다가 문득 강변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 유적지’란 표지판을 보자 그렇게 넌지시 물었다. 운전대를 잡은 아빠는 아들 민식에게 잠깐 눈길을 던진 뒤 입을 열었다.
“아빠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었으니까.”
“……지금도?”
“응, 지금도!”
“그런데 왜 날 안 데리고 왔어?”
“……어딜?”
“여기, 다산 정약용 유적지 말이야.”
아들의 그 말에 아빠는 씩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사실 오늘 드라이브 목적지가 바로 여기야.”
아빠의 대답에 민식이 화답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와, 이 도로 이름도 다산로래! 다산로 747번길…….”
아빠는 핸들을 돌려 다산 유적지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까 그렇겠지. 서울에 충무로, 퇴계로, 세종로가 있듯이 말이야. 너도 학교에서 다산 선생에 대해서 배웠겠지?”
그러자 민식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학교에서는 조금 배우고 내가 독학을 했지. 책으로. 학교 도서관에 정약용 샘 책 엄청 많거든.”
민식은 여유롭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짜식, 여유만만한대?”
아빠가 민식의 어깨를 툭 치며 유적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민식이 큰소리로 되받았다.
“여유만만? 어, 그거, 정약용 샘 호인데! 여유당!”
아빠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맞아, 맞아. 우리 아들, 초등학교 5학년 치고는 꽤 유식한데? 하지만 그 여유(餘裕)하고는 좀 다른 여유(與猶)이긴 해.”
그러자 민식이 뒷짐을 지고 양반걸음을 걸으면서 으흠, 하고 기침을 했다.
“이렇게, 이렇게, 천천히, 여유 있게 걸으란 말이지?”
아들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에 아빠가 웃음을 지으며 앞서 걸어갔다. 그러자 뒤에서 아들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산, 여유당…… 또 있지 아빠? 호가 더 있을 텐데?”
그러는 아들의 지적 호기심에 만족해하며 아빠가 대답했다.
“있고말고. 정약용 샘 호는 스무 가지가 넘는대. 다산, 여유당, 삼미자, 열수, 죽란산인, 철마산인, 사암 등등…….”
“그중에서 많이 알려진 게 다산과 여유당이네 아빠?”
“그렇지. 다산은 강진에 유배 가서 살던 집 다산초당에서 유래된 이름이고, 여유당은 바로…… 저기…… 저기 있네! 샘께서 태어나서 자라고 돌아가신 곳.”
아빠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여유당(與猶堂)’이란 표지판에 눈에 들어왔다. 표지판 앞에 서 있던 민식이 아빠에게 물었다.
“여유당이 무슨 뜻이야 아빠? 설마 여유롭게 사는 집이란 뜻은 아니겠지?”
아빠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그런 여유가 아니고 음…… 좀 어려운 얘긴데……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좋은 글을 따와서 다산 샘께서 당호(堂號, 집 이름)로 사용하셨단다….”
벼슬을 그만 두고
벼슬길에 나선 지 10년 동안 정적들로부터 끝없는 시샘과 모함을 받은 정약용은 1799년 봄, 가솔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월에 사직 상소를 올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은 마땅히 벼슬길에 나설 생각을 말았어야 했는데, 벼슬살이 한 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남의 미움을 받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위태롭고 불안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직책을 거치는 사이에 단 하루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은 이제 나아가도 의지할 곳이 없고 물러나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다만 신이 태어나서 자란 시골은 강과 호수, 새와 물고기 등 자연의 경관이 성정(性情)을 수양할 만하니, 착한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남은 생을 전원에서 쉬며 성스러운 임금님의 은혜를 노래한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정약용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다가 정약용이 거듭 부름에 나아가지 않자, 한 달이 지난 뒤에 형조참의(刑曹參議, 형조의 정3품 벼슬) 정약용의 체직(遞職, 벼슬 교체)을 허락했다. 그리고 꼭 1년 뒤인 1800년 6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보다 열 살 많은 49세의 젊은 나이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은 마땅히 벼슬길에 나설 생각을 말았어야 했는데, 벼슬살이 한 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남의 미움을 받은 것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위태롭고 불안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직책을 거치는 사이에 단 하루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은 이제 나아가도 의지할 곳이 없고 물러나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다만 신이 태어나서 자란 시골은 강과 호수, 새와 물고기 등 자연의 경관이 성정(性情)을 수양할 만하니, 착한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남은 생을 전원에서 쉬며 성스러운 임금님의 은혜를 노래한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정약용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다가 정약용이 거듭 부름에 나아가지 않자, 한 달이 지난 뒤에 형조참의(刑曹參議, 형조의 정3품 벼슬) 정약용의 체직(遞職, 벼슬 교체)을 허락했다. 그리고 꼭 1년 뒤인 1800년 6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보다 열 살 많은 49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지난 18년 동안 자신을 지극히 아껴주던 임금이 이제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자신을 그토록 헐뜯고 모함하던 정적들로부터 보호막이 되어주던 참으로 인자한 군왕이었는데…….
오랜만에 한양 벼슬살이를 정리하고 고향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돌아온 정약용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새겨 집에다가 걸어두었다. 그리고 ‘여유당기’를 지어서 왜 ‘여유’라는 당호를 취했는지를 설명했다.
‘……나의 병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용감하지만 지모(智謀)가 없고 선(善)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 모른다. 또한 맘 내키는 대로 즉시 행하여 의심할 줄 모르고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그만둘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마음에 기쁘게 느껴지면 그만두지 못하며…… 이 때문에 선을 끝없이 좋아하였으나 비방은 홀로 많이 받고 있다. 아, 이것이 또한 운명이란 말인가. 이것은 나의 본성 때문이니 내가 어찌 감히 운명을 말하겠는가. 내가 노자(老子)의 글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아, 이 말이야 말로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체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뼈를 에듯 하므로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건너지 않는다. 사방의 이웃이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기 몸에 이를까 염려하기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정약용은 지난날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다소 성급하고 신중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뜻 맞는 이들과 함께 군왕을 도와 개혁을 추구할 때도 늘 앞에 서다보니 남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신중하고 겸손했어야 했는데……. 순간 정약용은 노자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겨울에 찬 시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머뭇거리고(與兮若冬涉川),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경계한다(猶兮若畏四隣)’.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그 구절 중에서 첫 글자인 ‘여(與)’ 자와 ‘유(猶)’ 자를 따서 자신의 당호로 삼았던 것이다.
“아빠, 그럼 여유당전서는 또 뭐야?”
정약용 생가로 들어서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민식이 아빠에게 불쑥 물었다. 아빠가 대답했다.
“아 그건 정약용 샘께서 지으신 글을 모두 한데 모아 엮은 책 이름이란다. 어마어마한 분량이지. 그러니까 여유당은 곧 집 이름이기도 하지만 정약용 샘의 호이기도 해. 그래서 책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야.”
“아빠, 샘께서 유배도 가셨잖아. 거기에서 많은 책을 썼다고 했어.”
“맞아, 맞아. 여유당전서의 대부분을 강진 유배 시절 때 썼을 거야.”
민식은 아빠와 함께 다산 생가에서 나와 다산 기념관이란 곳으로 건너갔다. 거기에는 정약용이 쓴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던 민식이 아빠에게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빠, 근데 왜 샘께서 유배를 가게 되었어? 18년씩이나…….”
“아, 그건 말이지…….”
오랜만에 한양 벼슬살이를 정리하고 고향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돌아온 정약용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새겨 집에다가 걸어두었다. 그리고 ‘여유당기’를 지어서 왜 ‘여유’라는 당호를 취했는지를 설명했다.
‘……나의 병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용감하지만 지모(智謀)가 없고 선(善)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 모른다. 또한 맘 내키는 대로 즉시 행하여 의심할 줄 모르고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그만둘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마음에 기쁘게 느껴지면 그만두지 못하며…… 이 때문에 선을 끝없이 좋아하였으나 비방은 홀로 많이 받고 있다. 아, 이것이 또한 운명이란 말인가. 이것은 나의 본성 때문이니 내가 어찌 감히 운명을 말하겠는가. 내가 노자(老子)의 글을 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아, 이 말이야 말로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체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뼈를 에듯 하므로 매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건너지 않는다. 사방의 이웃이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자기 몸에 이를까 염려하기 때문에 매우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정약용은 지난날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다소 성급하고 신중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 뜻 맞는 이들과 함께 군왕을 도와 개혁을 추구할 때도 늘 앞에 서다보니 남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신중하고 겸손했어야 했는데……. 순간 정약용은 노자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겨울에 찬 시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머뭇거리고(與兮若冬涉川),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경계한다(猶兮若畏四隣)’.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그 구절 중에서 첫 글자인 ‘여(與)’ 자와 ‘유(猶)’ 자를 따서 자신의 당호로 삼았던 것이다.
“아빠, 그럼 여유당전서는 또 뭐야?”
정약용 생가로 들어서서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민식이 아빠에게 불쑥 물었다. 아빠가 대답했다.
“아 그건 정약용 샘께서 지으신 글을 모두 한데 모아 엮은 책 이름이란다. 어마어마한 분량이지. 그러니까 여유당은 곧 집 이름이기도 하지만 정약용 샘의 호이기도 해. 그래서 책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야.”
“아빠, 샘께서 유배도 가셨잖아. 거기에서 많은 책을 썼다고 했어.”
“맞아, 맞아. 여유당전서의 대부분을 강진 유배 시절 때 썼을 거야.”
민식은 아빠와 함께 다산 생가에서 나와 다산 기념관이란 곳으로 건너갔다. 거기에는 정약용이 쓴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던 민식이 아빠에게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빠, 근데 왜 샘께서 유배를 가게 되었어? 18년씩이나…….”
“아, 그건 말이지…….”
유배생활과 저술활동
한양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여유당에서 형제들이랑 모여 세상일과 학문에 대해서 논하며 비교적 여유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새벽, 관원들이 들이닥쳐 정약용을 붙들어갔다. 벼슬에서 물러나고 세력까지 약해진 그에게 정적들의 비방과 모함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듬해 봄, 정적들은 드디어 정약용이 사학(邪學, 천주교)에 물었다는 이유로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의 형제들과 함께였다. 정약용은 감옥에 갇힌 지 19일 만에 풀려나와 유배 길에 올랐다. 둘째 형 정약전도 유배 길에 올랐고 셋째형 정약종은 사형에 처해졌다.
정약용은 처음에 경상도 장기(長鬐, 포항 지역의 옛 지명)로 갔다가 그해 가을에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와, 18년씩이나 유배생활을 했다고? 천주교를 믿었다고…….”
“다산 샘께서는 그저 학문으로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공부한 것뿐이었는데, 집안 친인척들 중에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많았던 탓에…… 어쩌면 억울한 측면도 많았지.”
“그래서 샘께서 유배생활 하시면서 엄청난 책들을 쓰셨다, 이 얘기잖아.”
“그렇지.”
“……전화위복,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렷다!”
민식의 그 말에 아빠는 피시식, 속웃음을 웃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책을 썼다. 그리고 자신의 책이 먼 훗날까지 전해지기를 바랐다. 그는 고향집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 묻어나는 편지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듬해 봄, 정적들은 드디어 정약용이 사학(邪學, 천주교)에 물었다는 이유로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의 형제들과 함께였다. 정약용은 감옥에 갇힌 지 19일 만에 풀려나와 유배 길에 올랐다. 둘째 형 정약전도 유배 길에 올랐고 셋째형 정약종은 사형에 처해졌다.
정약용은 처음에 경상도 장기(長鬐, 포항 지역의 옛 지명)로 갔다가 그해 가을에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와, 18년씩이나 유배생활을 했다고? 천주교를 믿었다고…….”
“다산 샘께서는 그저 학문으로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공부한 것뿐이었는데, 집안 친인척들 중에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많았던 탓에…… 어쩌면 억울한 측면도 많았지.”
“그래서 샘께서 유배생활 하시면서 엄청난 책들을 쓰셨다, 이 얘기잖아.”
“그렇지.”
“……전화위복,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렷다!”
민식의 그 말에 아빠는 피시식, 속웃음을 웃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책을 썼다. 그리고 자신의 책이 먼 훗날까지 전해지기를 바랐다. 그는 고향집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자신의 간절한 마음이 묻어나는 편지였다.
‘내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그저 실낱같은 목숨만은 보전하며 여러 해 동안 곤궁하게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저술한 책이 많아졌다. ……나는 임술년(1802년) 봄부터 책을 저술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해 왔다. 그 결과 왼쪽 팔이 마비되어 마침내 폐인이 다 되어가고 시력은 아주 형편없이 나빠져 오로지 안경에만 의존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너희들이 내 저술을 전하여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 죽은 후에 아무리 청결한 희생과 풍성한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준다고 해도 내가 흠향하고 기뻐하기는 내 책 한편 읽어주고 내 책 한 구절이라도 베껴두는 일보다 못하게 여길 것이다. 너희들은 이 점을 새겨두기 바란다.’
사학죄인으로 몰려 폐족이 된 자신의 가문이었다. 정약용은 걱정이 많았다. 과연 자신의 책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까. 자식들에게 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작물이 사라지지 않도록 거듭거듭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1818년 9월 14일, 정약용은 돌아왔다.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고향 집 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쓴 책들과 함께.
여유당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계속해서 자신의 책들을 수정하고 보완했다. 그렇게 해서 183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500권에 달하는 필사본(손으로 써서 만든 책)을 남기게 되었다. 하지만 대대로 가난했던 후손들은 이 거대한 분량의 책을 출판하지 못한 채 그저 상자 속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사학죄인으로 몰려 폐족이 된 자신의 가문이었다. 정약용은 걱정이 많았다. 과연 자신의 책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까. 자식들에게 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작물이 사라지지 않도록 거듭거듭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1818년 9월 14일, 정약용은 돌아왔다.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고향 집 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쓴 책들과 함께.
여유당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계속해서 자신의 책들을 수정하고 보완했다. 그렇게 해서 183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500권에 달하는 필사본(손으로 써서 만든 책)을 남기게 되었다. 하지만 대대로 가난했던 후손들은 이 거대한 분량의 책을 출판하지 못한 채 그저 상자 속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홍수에서 건져 올린 실학
“민식아, 다산 샘의 생명과도 같은 이 소중한 저술들이 몽땅 사라질 뻔한 일이 있었단다.”
다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정약용의 여러 저서 앞에 서 있던 아빠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민식이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말이나 돼? 도둑놈이 훔쳐가려 했나?”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 어느 여름에 우리나라에 큰 물난리가 났대. 바로 을축년 대홍수인데 그때 죽은 사람이 어마어마했나봐. 피해액도 상당했고.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한강 철교도 떠내려갔고 남대문에까지 물이 들어찼다는 구나. 그때 정약용 샘의 이곳 고향 마을도 물바다가 됐지.”
“그래? 그래 어떻게 됐어 아빠?”
“샘께서 사시던 여유당 집은 물에 둥둥 떠내려갔고, 집 뒤에 있던 산소에까지 물이 들어찼다는구나.”
“와, 어쩌지? 유배생활하실 때 쓰신 책들은 어떻게 됐어 아빠?”
“음…… 다행이…….”
한강의 상류이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정약용의 고향 마을도 피해가 막대했다. 을축년 대홍수는 정약용이 죽은 지 90년 뒤에 일어났는데, 그때 여유당엔 정약용의 후손인 정규영이 살고 있었다. 쉰 살이 넘은 그는 불어나는 물길도 겁내지 않고 안채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던 책 상자를 건져냈다고 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살았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왔던 30여 칸에 이르는 기와집이 물에 휩쓸려 갈 때 정약용의 4대 손이었던 정규영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집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손때 묻은 수천 권의 책과 어린 시절에 심어놓은 향나무까지 쓸려나가는 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필사의 노력으로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던 단 한 벌의 책만은 건져냈다. 바로 여유당집이었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생활 때 기초해서 집에 돌아와 탈고한 183 책의 저술들이었다. 하지만 자손이 대대로 가난해서 출판하지 못하고 그저 먼지 앉은 상자에 보관만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만약 그때 정약용 샘의 책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면, 그 집안뿐만 국가적으로도 막대한 손해를 입었을 거야.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저작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다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정약용의 책들을 내려다보며 아빠가 말했다.
“그러게. 다산 샘 후손이라는 그분, 되게 용감하셨네. 짱이야, 짱. 하하.”
“맞아. 아주 훌륭하신 일을 하신 셈이지.”
다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정약용의 여러 저서 앞에 서 있던 아빠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민식이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말이나 돼? 도둑놈이 훔쳐가려 했나?”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 어느 여름에 우리나라에 큰 물난리가 났대. 바로 을축년 대홍수인데 그때 죽은 사람이 어마어마했나봐. 피해액도 상당했고.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한강 철교도 떠내려갔고 남대문에까지 물이 들어찼다는 구나. 그때 정약용 샘의 이곳 고향 마을도 물바다가 됐지.”
“그래? 그래 어떻게 됐어 아빠?”
“샘께서 사시던 여유당 집은 물에 둥둥 떠내려갔고, 집 뒤에 있던 산소에까지 물이 들어찼다는구나.”
“와, 어쩌지? 유배생활하실 때 쓰신 책들은 어떻게 됐어 아빠?”
“음…… 다행이…….”
한강의 상류이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정약용의 고향 마을도 피해가 막대했다. 을축년 대홍수는 정약용이 죽은 지 90년 뒤에 일어났는데, 그때 여유당엔 정약용의 후손인 정규영이 살고 있었다. 쉰 살이 넘은 그는 불어나는 물길도 겁내지 않고 안채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던 책 상자를 건져냈다고 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살았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왔던 30여 칸에 이르는 기와집이 물에 휩쓸려 갈 때 정약용의 4대 손이었던 정규영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집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손때 묻은 수천 권의 책과 어린 시절에 심어놓은 향나무까지 쓸려나가는 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필사의 노력으로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던 단 한 벌의 책만은 건져냈다. 바로 여유당집이었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생활 때 기초해서 집에 돌아와 탈고한 183 책의 저술들이었다. 하지만 자손이 대대로 가난해서 출판하지 못하고 그저 먼지 앉은 상자에 보관만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만약 그때 정약용 샘의 책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면, 그 집안뿐만 국가적으로도 막대한 손해를 입었을 거야.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저작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다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정약용의 책들을 내려다보며 아빠가 말했다.
“그러게. 다산 샘 후손이라는 그분, 되게 용감하셨네. 짱이야, 짱. 하하.”
“맞아. 아주 훌륭하신 일을 하신 셈이지.”
1925년 7월 18일 새벽, 정규영은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어르신, 어서 피하세요! 어서 배를 타고 여기를 빠져나가야 해요!”
그러나 정규영은 초롱불을 들고 허리까지 차오른 물길을 헤쳐 안방 다락으로 향했다. 집안에서 가장 안전할 것 같아서 며칠 전에 다산 할아버지의 여유당집을 거기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난 안 나가. 아니, 못 나가지. 책 상자를 건지지 못할 바엔 차라리 책과 함께 한강의 귀신으로 남는 게 낫지.”
집안으로 밀려들어온 물이 방문을 밀치면서 여기저기서 털썩, 빠지직, 소리가 났다. 정규영은 손에 들고 있던 초롱불을 내팽개치고 안방 문을 열었다. 방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어서 나오시오! 배 떠납니다! 무작정 기다릴 여유가 없어요!”
밖에서 대기하던 구조선에서 외치는 소리가 났다. 정규영은 아랑곳없이 다락으로 올라가 책 상자 위에 쌓여있던 물건들을 치웠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 책 상자를 들어 등에 걸머지고 캄캄한 방안을 빠져나왔다. 물은 어느새 가슴 높이까지 들어찼다.
“책이 다 젖는구나! 다산 할아버지 책이 다 젖어!”
쉰 살이 넘은 정규영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마침 기다리던 구조선에 올라탔다. 그리고 처마까지 물에 잠기는 여유당을 뒤로 하고 한강으로 변한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잠시 뒤 그는 구조선에서 내렸다.
“내가 이걸 걸머지고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내려주시오. 저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실컷 울다 죽으리다.”
정규영은 희미하게 밝아오는 미명 속에 책 상자를 걸머지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다산 할아버지의 산소였다. 그러나 불어난 강물은 이미 산소 앞에까지 들어차 있었다. 할아버지 산소 앞에 책 상자를 내려놓은 정규영은 서럽게 울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하마터면 할아버지의 책들을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그 험하고 먼 유배 길에 쓰신 책들을…….”
그때 정규영은 보았다. 바다처럼 훤한 한강물 위로 배처럼 두둥실 떠가는 고향집 여유당의 모습을. 대대로 살아온 30여 칸의 기와집이 꿈처럼 멀어져가고 있었다. 다산 할아버지의 숱한 유품들과 함께.
정규영은 물에 젖은 책 상자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그래도 다행이지요. 여유당집은 건졌으니…….”
그러나 정규영은 초롱불을 들고 허리까지 차오른 물길을 헤쳐 안방 다락으로 향했다. 집안에서 가장 안전할 것 같아서 며칠 전에 다산 할아버지의 여유당집을 거기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난 안 나가. 아니, 못 나가지. 책 상자를 건지지 못할 바엔 차라리 책과 함께 한강의 귀신으로 남는 게 낫지.”
집안으로 밀려들어온 물이 방문을 밀치면서 여기저기서 털썩, 빠지직, 소리가 났다. 정규영은 손에 들고 있던 초롱불을 내팽개치고 안방 문을 열었다. 방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어서 나오시오! 배 떠납니다! 무작정 기다릴 여유가 없어요!”
밖에서 대기하던 구조선에서 외치는 소리가 났다. 정규영은 아랑곳없이 다락으로 올라가 책 상자 위에 쌓여있던 물건들을 치웠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 책 상자를 들어 등에 걸머지고 캄캄한 방안을 빠져나왔다. 물은 어느새 가슴 높이까지 들어찼다.
“책이 다 젖는구나! 다산 할아버지 책이 다 젖어!”
쉰 살이 넘은 정규영은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마침 기다리던 구조선에 올라탔다. 그리고 처마까지 물에 잠기는 여유당을 뒤로 하고 한강으로 변한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잠시 뒤 그는 구조선에서 내렸다.
“내가 이걸 걸머지고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내려주시오. 저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실컷 울다 죽으리다.”
정규영은 희미하게 밝아오는 미명 속에 책 상자를 걸머지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다산 할아버지의 산소였다. 그러나 불어난 강물은 이미 산소 앞에까지 들어차 있었다. 할아버지 산소 앞에 책 상자를 내려놓은 정규영은 서럽게 울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하마터면 할아버지의 책들을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그 험하고 먼 유배 길에 쓰신 책들을…….”
그때 정규영은 보았다. 바다처럼 훤한 한강물 위로 배처럼 두둥실 떠가는 고향집 여유당의 모습을. 대대로 살아온 30여 칸의 기와집이 꿈처럼 멀어져가고 있었다. 다산 할아버지의 숱한 유품들과 함께.
정규영은 물에 젖은 책 상자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그래도 다행이지요. 여유당집은 건졌으니…….”
“아빠, 정말 천만다행이었네! 만약 그때 홍수에 떠내려갔다면 어떡할 뻔했어!”
민식은 상기된 얼굴로 정약용의 저작물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민식은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어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정규영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렇지. 고맙고 훌륭하신 분이시지. 홍수에서 조선의 실학을 건져 올리신 분이시니.”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 정약용의 저작물들은 약 10년 뒤인 1934에서 1938년 사이에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여유당전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154권 76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저작물이었다.
“아빠, 이왕 온 김에 저 위에 있는 다산 묘소까지 참배하고 가자!”
“그래. 당연하지. 하하하.”
민식은 상기된 얼굴로 정약용의 저작물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민식은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어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정규영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렇지. 고맙고 훌륭하신 분이시지. 홍수에서 조선의 실학을 건져 올리신 분이시니.”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 정약용의 저작물들은 약 10년 뒤인 1934에서 1938년 사이에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여유당전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154권 76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저작물이었다.
“아빠, 이왕 온 김에 저 위에 있는 다산 묘소까지 참배하고 가자!”
“그래. 당연하지. 하하하.”
스토리원고 | | | 채종인 작가 |
연구원고 | | | 김보름(안양대) |
일러스트 | | | 컬처랩 |
참고문헌
『여유당과 홍수에서 건져 올린 실학』김보름.
『사암선생연보』정규영. 창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정약용. 창비.
『다산 정약용 평전』박석무. 민음사.
『여유당과 홍수에서 건져 올린 실학』김보름.
『사암선생연보』정규영. 창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정약용. 창비.
『다산 정약용 평전』박석무.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