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암 권철신_감호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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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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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암 권철신_감호를 떠나며
감호를 떠나며 –권철신-
1801년 봄
지난 해, 선왕이 돌아가시고 어린 세자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시자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감호의 산천도 몸을 사리었다. 집 뒤 양근 갈산의 나뭇잎들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고, 집 앞 남한강도 부산스럽게 흐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해가 바뀌고 새 봄이 찾아오자, 강변의 버드나무 가지처럼 어지러운 소식들이 감호로 흘러들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 것이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어찌 세월 탓이며 흉년들고 굶주리는 것이 어찌 임금 탓이겠느냐. 하지만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자식으로 여겨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어찌하여 임금을 저버리고 사학(邪學, 천주교를 이름)에 물들어 상을 받듯이 형장으로 몰려가는가. 백성들이 미친 듯이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따르지 않는데, 어찌 임금이 백성의 아비로서 다급하지 않겠는가. 타이르고 또 타일러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극형으로 다스리려 하니, 수령들과 방백들은 사학의 무리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찌꺼기 하나 남아 있지 않게 하라.’
양근(경기도 양평군의 옛 이름) 고을 관아 앞에 나붙은 벽보를 읽고 돌아온 66살의 권철신에게 아들 권상문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또 회오리바람이 몰아칠 까봐 걱정입니다, 아버님.”
삼십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아들의 근심어린 목소리에 산전수전 다 격은 늙은 권철신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 신해년(辛亥年, 1791년) 때의 일이 마귀의 얼굴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회초리로 재를 치는 격이로구나. 치면 칠수록 재는 흩어질밖에…….”
나지막이 입을 여는 늙은 유학자 권철신의 눈에 눈물이 비치었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 것이다.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어찌 세월 탓이며 흉년들고 굶주리는 것이 어찌 임금 탓이겠느냐. 하지만 임금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자식으로 여겨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어찌하여 임금을 저버리고 사학(邪學, 천주교를 이름)에 물들어 상을 받듯이 형장으로 몰려가는가. 백성들이 미친 듯이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따르지 않는데, 어찌 임금이 백성의 아비로서 다급하지 않겠는가. 타이르고 또 타일러도 따르지 않는 자들은 극형으로 다스리려 하니, 수령들과 방백들은 사학의 무리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찌꺼기 하나 남아 있지 않게 하라.’
양근(경기도 양평군의 옛 이름) 고을 관아 앞에 나붙은 벽보를 읽고 돌아온 66살의 권철신에게 아들 권상문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또 회오리바람이 몰아칠 까봐 걱정입니다, 아버님.”
삼십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아들의 근심어린 목소리에 산전수전 다 격은 늙은 권철신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 신해년(辛亥年, 1791년) 때의 일이 마귀의 얼굴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회초리로 재를 치는 격이로구나. 치면 칠수록 재는 흩어질밖에…….”
나지막이 입을 여는 늙은 유학자 권철신의 눈에 눈물이 비치었다.
집 뒤꼍 매화가 지고 갈산의 진달래도 바삐 왔다갔다. 무엇이 그리 두려웠는지 남한강변의 개나리도 피다말고 연둣빛 새순을 실눈 뜨듯 내밀던 어느 날, 한양 궁궐의 대신들이 권철신을 물고 늘어졌다. 빗발치는 상소였다.
‘권철신은 바로 사악한 역적인 권일신(1791년, 진산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함)의 형입니다. 이 자에게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동생이 죽임을 당한 뒤에는 마땅히 눈물을 흘리며 죄를 반성하여 마음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집스럽게 허물을 고칠 줄 모르고 어리석게도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 자식에게까지 요망한 사설을 가르쳐 퍼뜨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흉악스럽게 뉘우치지 않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권철신은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명성을 얻었고, 매우 명민하고 지식이 해박하다는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우 권일신이 한번 사학에 빠진 뒤로는 함께 부화뇌동하여 온 가족이 물들고 말았습니다. 장차 무엇을 하자는 것이겠습니까?’
‘그 소굴의 주인은 바로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입니다. 그런데 권일신이 죄를 받아 죽은 뒤에도 그의 무리가 허물을 고칠 줄 모르고 여전히 설쳐대며 왕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권철신의 온 집안이 사학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자백을 받지 않아도 분명해 보입니다.’
권철신은 눈을 감았다. 10년 전, 사학의 우두머리로 몰린 동생이 한창 나이에 곤장을 맞고 유배 가는 길에 죽었다. 그 뒤로 늙은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자신을 찾아오던 젊은 유학자들도 발길을 끊었다. 평생 주자(朱子, 중국 송나라 유학자)만 모시며 살아온 선비 권철신은 대문을 닫아걸고 10년 세월을 죽은 듯이 지냈다. 그런데…….
권철신은 고개를 들었다. 사랑방 앞에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에서 매혹적인 향기가 흘러나왔다. 늙은 권철신은 코를 벌렁거리며 애써 봄기운을 들이마셨다. 강한 향기에 취했는지 정신이 몽롱해졌다. 다시 눈을 감았다.
‘권철신은 바로 사악한 역적인 권일신(1791년, 진산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함)의 형입니다. 이 자에게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동생이 죽임을 당한 뒤에는 마땅히 눈물을 흘리며 죄를 반성하여 마음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집스럽게 허물을 고칠 줄 모르고 어리석게도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 자식에게까지 요망한 사설을 가르쳐 퍼뜨리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흉악스럽게 뉘우치지 않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권철신은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명성을 얻었고, 매우 명민하고 지식이 해박하다는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우 권일신이 한번 사학에 빠진 뒤로는 함께 부화뇌동하여 온 가족이 물들고 말았습니다. 장차 무엇을 하자는 것이겠습니까?’
‘그 소굴의 주인은 바로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입니다. 그런데 권일신이 죄를 받아 죽은 뒤에도 그의 무리가 허물을 고칠 줄 모르고 여전히 설쳐대며 왕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권철신의 온 집안이 사학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자백을 받지 않아도 분명해 보입니다.’
권철신은 눈을 감았다. 10년 전, 사학의 우두머리로 몰린 동생이 한창 나이에 곤장을 맞고 유배 가는 길에 죽었다. 그 뒤로 늙은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자신을 찾아오던 젊은 유학자들도 발길을 끊었다. 평생 주자(朱子, 중국 송나라 유학자)만 모시며 살아온 선비 권철신은 대문을 닫아걸고 10년 세월을 죽은 듯이 지냈다. 그런데…….
권철신은 고개를 들었다. 사랑방 앞에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에서 매혹적인 향기가 흘러나왔다. 늙은 권철신은 코를 벌렁거리며 애써 봄기운을 들이마셨다. 강한 향기에 취했는지 정신이 몽롱해졌다. 다시 눈을 감았다.
감호정과 감호암
어린 시절 권철신은 행복했다. 자상하신 아버지는 집안 식솔뿐만 아니라 종이나 집에서 기르는 짐승에게도 정을 베풀었다. 귀한 음식이 생기면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종들에게까지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철신아!”
“네, 아버지.”
“명심하거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섬기는 사대부 집안이란다. 저 옛날 권근(權近, 조선 초의 문신)이란 분은 뛰어난 성리학자셨고, 권람(權擥)이란 분은 좌의정까지 지내신 분이시다. 또 그분의 아드님이 권건(權健) 어르신인데, 이분은 홍문관 제학을 지내신 분이지. 글씨와 문장이 아주 훌륭하셨단다.”
“네…….”
“네 증조부만 해도 이조참판을 지내신 권흠(權歆) 어른 아니시더냐. 각별히 유념해서 공부에 매진하거라.”
“네,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권철신의 아버지 권암(權巖)은 행동이 바르고 문학을 좋아하였는데, 늘그막에 양근 고을의 감호에 자리 잡고 살았다. 아버지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가 권철신이었다. 권철신은 젊어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고을 서쪽 남한강변에 있는 감호정(鑑湖亭)에 올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곤 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권숙신, 권일신, 권제신 등 동생들도 함께 어울려 시원한 정자에 올라 글을 짓고 차를 마시고 하였다. 거기에는 홍한보, 이유상 같은 아버지의 벗들도 섞여 있었다. 시회를 열다가 흥이 나면 일행은 배를 타고 남한강을 유람하며 강변에 우람하게 서 있는 감호암(鑑湖岩)과, 그 바위 위에 우뚝하게 솟아있는 감호정을 바라보곤 했다. 감호암과 감호정. 양근 고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뱃놀이를 하며 시를 짓고 차를 마시곤 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형제와 사이좋게 지내야 진정한 선비다. 이웃과 자식은 사랑으로 보살피고 짐승이나 종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아버지 권암은 감호 마을의 넉넉한 풍경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맏아들에게 당부하곤 했었다.
“철신아!”
“네, 아버지.”
“명심하거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섬기는 사대부 집안이란다. 저 옛날 권근(權近, 조선 초의 문신)이란 분은 뛰어난 성리학자셨고, 권람(權擥)이란 분은 좌의정까지 지내신 분이시다. 또 그분의 아드님이 권건(權健) 어르신인데, 이분은 홍문관 제학을 지내신 분이지. 글씨와 문장이 아주 훌륭하셨단다.”
“네…….”
“네 증조부만 해도 이조참판을 지내신 권흠(權歆) 어른 아니시더냐. 각별히 유념해서 공부에 매진하거라.”
“네,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권철신의 아버지 권암(權巖)은 행동이 바르고 문학을 좋아하였는데, 늘그막에 양근 고을의 감호에 자리 잡고 살았다. 아버지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가 권철신이었다. 권철신은 젊어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고을 서쪽 남한강변에 있는 감호정(鑑湖亭)에 올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곤 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권숙신, 권일신, 권제신 등 동생들도 함께 어울려 시원한 정자에 올라 글을 짓고 차를 마시고 하였다. 거기에는 홍한보, 이유상 같은 아버지의 벗들도 섞여 있었다. 시회를 열다가 흥이 나면 일행은 배를 타고 남한강을 유람하며 강변에 우람하게 서 있는 감호암(鑑湖岩)과, 그 바위 위에 우뚝하게 솟아있는 감호정을 바라보곤 했다. 감호암과 감호정. 양근 고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뱃놀이를 하며 시를 짓고 차를 마시곤 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형제와 사이좋게 지내야 진정한 선비다. 이웃과 자식은 사랑으로 보살피고 짐승이나 종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아버지 권암은 감호 마을의 넉넉한 풍경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맏아들에게 당부하곤 했었다.
스승 이익
권철신이 안산에 있는 성호 이익(李瀷,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의 문하로 들어간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일흔이 넘은 늙은 노학자는 권철신을 가르치면서 흡족한 나머지 권철신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철신은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고 자신의 허물은 조금이라도 감추지 않고 들추어내니, 이는 요즘 보기 드문 모습입니다. 모든 면에서 진중하고 겸손한 자세는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권철신 또한 스승 이익을 당대 최고의 학자로 떠받들고 있었다. 여든이 가까워 오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형형한 눈빛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노학자의 열정에 권철신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실천해서 정자와 주자를 따르고, 더 거슬러 올라가 공자의 심오한 뜻을 깨닫도록 하여라.”
“네,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성호 이익은 만년에 얻은 제자가 자랑스러웠다. 명민하고 지혜롭고, 어질고 온화하여 재주와 덕행을 두루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뒤를 잇는 대학자가 되어주기를 바랬다.
‘철신은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고 자신의 허물은 조금이라도 감추지 않고 들추어내니, 이는 요즘 보기 드문 모습입니다. 모든 면에서 진중하고 겸손한 자세는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권철신 또한 스승 이익을 당대 최고의 학자로 떠받들고 있었다. 여든이 가까워 오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형형한 눈빛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노학자의 열정에 권철신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실천해서 정자와 주자를 따르고, 더 거슬러 올라가 공자의 심오한 뜻을 깨닫도록 하여라.”
“네,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성호 이익은 만년에 얻은 제자가 자랑스러웠다. 명민하고 지혜롭고, 어질고 온화하여 재주와 덕행을 두루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뒤를 잇는 대학자가 되어주기를 바랬다.
스승 이익의 집엔 수천 권의 책이 쌓여 있었다. 스승의 아버지 이하진이 진위사(進慰使, 중국 황실에 파견하던 사신)로 연경에 갔다가 청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궤사은(饋賜銀, 하사금)으로 사가지고 온 책이었다. 스승은 덕분에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었다.
“시야를 넓혀야 한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시야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책을 읽어야 하지.”
권철신은 스승의 집에서 많은 책을 접했다.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책들이었다. 천문, 지리, 수학 등 한문으로 번역된 책들 외에도 세계지도나 서양화 같은 신문물도 직접 감상했다. 그 중에서도 권철신이 가장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읽은 책은 천주교 서적들이었다.
“철신이 자네는 문학으로는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처럼 될 것이고 학문을 전파하기로는 자공(子貢, 공자의 제자로 언어에 뛰어남)과 같이 될 걸세. 감호로 돌아간 뒤에도 열심히 후학들을 가르쳐 이 스승의 뒤를 이어주게나.”
“잘 알겠습니다,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시야를 넓혀야 한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시야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책을 읽어야 하지.”
권철신은 스승의 집에서 많은 책을 접했다.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책들이었다. 천문, 지리, 수학 등 한문으로 번역된 책들 외에도 세계지도나 서양화 같은 신문물도 직접 감상했다. 그 중에서도 권철신이 가장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읽은 책은 천주교 서적들이었다.
“철신이 자네는 문학으로는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처럼 될 것이고 학문을 전파하기로는 자공(子貢, 공자의 제자로 언어에 뛰어남)과 같이 될 걸세. 감호로 돌아간 뒤에도 열심히 후학들을 가르쳐 이 스승의 뒤를 이어주게나.”
“잘 알겠습니다,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권철신의 명망과 우애
스승 이익이 죽고 나자 권철신의 학문적 명망을 익히 알고 있는 많은 후학들이 그의 문하로 모여들었다. 덕분에 감호의 권철신 집은 늘 선비들로 북적거렸다. 그 중에는 정약전, 정약용 형제 등 이웃 마을의 젊은 학자들도 있었다.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권철신을 젊은 유학자들은 좋아했다.
권철신은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생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학문은 물론이고 먹고사는 일에도 남달랐다. 네 동생들이 한 마을에 살면서 어린 조카들이랑 자신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 하여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집안에 가득한 아들과 조카들이 마치 친형제처럼 지냈고, 집안에서 기르는 짐승들도 길이 잘 들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또한 형제간에는 노비나 전답, 창고의 곡식까지 내 것 네 것 구별 없이 함께 사용했다. 이런 화기애애한 집안 분위기는 선친 때부터 이어오던 가풍이었다. 누구라도 그의 집안에 들어서면 온화한 기운이 충만해서 마치 훈훈한 향기가 온몸에 스며드는 듯 했다.
권철신은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생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학문은 물론이고 먹고사는 일에도 남달랐다. 네 동생들이 한 마을에 살면서 어린 조카들이랑 자신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 하여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집안에 가득한 아들과 조카들이 마치 친형제처럼 지냈고, 집안에서 기르는 짐승들도 길이 잘 들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또한 형제간에는 노비나 전답, 창고의 곡식까지 내 것 네 것 구별 없이 함께 사용했다. 이런 화기애애한 집안 분위기는 선친 때부터 이어오던 가풍이었다. 누구라도 그의 집안에 들어서면 온화한 기운이 충만해서 마치 훈훈한 향기가 온몸에 스며드는 듯 했다.
감호를 드나들던 선비 중에는 이벽(李檗)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사는 정약현을 매형으로 둔 그는 약현의 동생인 약전, 약용 형제와 자주 어울렸다. 그 또한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마에만 노력하는 선비였는데, 마침내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서학(천주교)에 눈이 밝았다., 이는 그의 고조부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수행해 북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많은 서학 책이 집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천주실의’ ‘영언여작’ ‘주제군징’ ‘칠극’ 등 많은 서학 책을 공부한 뒤여서 그쪽에 눈이 밝았다. 권철신 또한 지적 호기심이 많은 터라 그에게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그대가 싸가지고 온 책 중에 틀림없이 볼만한 것이 있을 터인데…… 천주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마음을 어찌 혼자서만 비밀스레 보고 행하려 하는 겐가? 공자께서는 저 혼자서만 군자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아니 했던가, 이 사람아…….”
권철신은 이미 스승 이익의 집에서 서학 책을 본 적은 있었지만 공부까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벽을 만나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서양이라고 하는 저쪽 세계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감호 어르신. 서양에서도 서학을 금해 천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수만 명 백성이 목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보시겠습니까?”
이벽의 도전적인 질문에 권철신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만약 내가 서학 책을 봤다가 잡혀간다면 지금껏 쌓아온 명성은 무엇이며 집안은 어찌되는 건가. 한참 뒤 한껏 낮은 목소리로 권철신이 대답했다.
“……단지 그저 학문으로 접해보겠다는 거지. 그렇다고 천주라는 분을 딱 믿어 섬긴다, 이 말은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 해서 이익의 후계자 권철신 유학자는 서학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형제들 중에 가장 열정적으로 서학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은 둘째 동생 권일신이었다.
그는 이미 ‘천주실의’ ‘영언여작’ ‘주제군징’ ‘칠극’ 등 많은 서학 책을 공부한 뒤여서 그쪽에 눈이 밝았다. 권철신 또한 지적 호기심이 많은 터라 그에게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그대가 싸가지고 온 책 중에 틀림없이 볼만한 것이 있을 터인데…… 천주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마음을 어찌 혼자서만 비밀스레 보고 행하려 하는 겐가? 공자께서는 저 혼자서만 군자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아니 했던가, 이 사람아…….”
권철신은 이미 스승 이익의 집에서 서학 책을 본 적은 있었지만 공부까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벽을 만나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서양이라고 하는 저쪽 세계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감호 어르신. 서양에서도 서학을 금해 천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수만 명 백성이 목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보시겠습니까?”
이벽의 도전적인 질문에 권철신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만약 내가 서학 책을 봤다가 잡혀간다면 지금껏 쌓아온 명성은 무엇이며 집안은 어찌되는 건가. 한참 뒤 한껏 낮은 목소리로 권철신이 대답했다.
“……단지 그저 학문으로 접해보겠다는 거지. 그렇다고 천주라는 분을 딱 믿어 섬긴다, 이 말은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 해서 이익의 후계자 권철신 유학자는 서학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형제들 중에 가장 열정적으로 서학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은 둘째 동생 권일신이었다.
천진암과 주어사
권철신의 폭넓고 관대한 학문 세계를 걱정하던 사람도 있었다. 바로 스승 이익의 초기 제자 중 한 명인 안정복(安鼎福)이었다. 그는 동생 권일신의 장인이기도 했는데, 이병휴(李秉休) 보낸 편지에서 속내를 내비췄다.
‘권철신은 대단히 민첩한데 그것이 도리어 병통이 될 수도 있소. 진실로 당대의 기재(奇才, 뛰어난 재주)이긴 하지만 크게 되려면 한갓 재주에 그쳐서는 안 되오. 이 사람의 날리는 기운을 묵직하게 가라앉혀 줄 필요가 있소.’
권철신은 안정복보다 이병휴의 학문적 입장을 따랐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병휴는 기대와는 달리 이렇게 답장을 썼다.
‘다만 선유(先儒, 앞 세대 유학자)의 말과 다르다고 해서 배척한다면 이것이 어찌 선배가 후배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너그러이 살펴주시지요.’
서학을 불교와 마찬가지로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안정복은 서학까지 공부한다는 권철신의 처신에 불만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철신은 이미 서학의 바다에 깊숙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1777년부터 시작해서 1779년까지 이어진 강학회(講學會,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모임)에서도 증명이 되었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젊은 유학자들은 스승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독특한 학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천진암(天眞庵,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던 사찰)과 주어사(走魚寺, 여주시 산북면에 있던 사찰)에서 공부모임을 가졌다. 강의 내용은 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위주로 했지만, 당시에 전래된 서학 책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연구했다.
특히 기해년(1779년) 겨울, 주어사에서 있었던 강학회는 권철신으로서는 잊을 수가 없는 일이 되었다. 해발 676미터 앵자봉 정상 가까이에 있는 이 조그마한 절에서 권철신은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젊은 후학들과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천진암에서 공부하고 있던 이벽이 한밤중에 눈길을 밟고 찾아왔다. 조선 최고의 천주교 학자가 강학에 참여하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이벽은 이미 몇 년째 천진암에서 서학 공부를 하고 있는 터였다. 새벽에 꽁꽁 얼어붙은 도랑을 깨고 찬물로 세수하는 권철신에게 이벽이 물었다.
“감호 선생님, 서학 책은 다 읽어보셨겠지요?”
“그렇다네.”
“어떠하던가요?”
“……딱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군.”
“이제 우리 조선에서도 천주님을 믿고 공경하는 예를 갖춰야할 텐데 법도를 알 수 없으니…… 그렇다고 서양 신부님을 모셔올 수도 없고. 중국 북경엔 서양 신부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모여서 예를 올리는 천주당도 지어져 있고요.”
권철신은 말이 없었다. 그런 권철신의 무거운 표정을 살피던 이벽이 새벽 산사의 풍경소리들 뒤로 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천주공경가’를 지어야겠어요.”
그때 이벽보다 네 살 아래인 정약전이 어느새 다가와 기다렸다는 듯 거들었다.
“옳습니다. 꼭 필요하겠지요, 사형.”
‘권철신은 대단히 민첩한데 그것이 도리어 병통이 될 수도 있소. 진실로 당대의 기재(奇才, 뛰어난 재주)이긴 하지만 크게 되려면 한갓 재주에 그쳐서는 안 되오. 이 사람의 날리는 기운을 묵직하게 가라앉혀 줄 필요가 있소.’
권철신은 안정복보다 이병휴의 학문적 입장을 따랐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이병휴는 기대와는 달리 이렇게 답장을 썼다.
‘다만 선유(先儒, 앞 세대 유학자)의 말과 다르다고 해서 배척한다면 이것이 어찌 선배가 후배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너그러이 살펴주시지요.’
서학을 불교와 마찬가지로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안정복은 서학까지 공부한다는 권철신의 처신에 불만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철신은 이미 서학의 바다에 깊숙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1777년부터 시작해서 1779년까지 이어진 강학회(講學會,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모임)에서도 증명이 되었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젊은 유학자들은 스승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독특한 학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천진암(天眞庵,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던 사찰)과 주어사(走魚寺, 여주시 산북면에 있던 사찰)에서 공부모임을 가졌다. 강의 내용은 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위주로 했지만, 당시에 전래된 서학 책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연구했다.
특히 기해년(1779년) 겨울, 주어사에서 있었던 강학회는 권철신으로서는 잊을 수가 없는 일이 되었다. 해발 676미터 앵자봉 정상 가까이에 있는 이 조그마한 절에서 권철신은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젊은 후학들과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천진암에서 공부하고 있던 이벽이 한밤중에 눈길을 밟고 찾아왔다. 조선 최고의 천주교 학자가 강학에 참여하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이벽은 이미 몇 년째 천진암에서 서학 공부를 하고 있는 터였다. 새벽에 꽁꽁 얼어붙은 도랑을 깨고 찬물로 세수하는 권철신에게 이벽이 물었다.
“감호 선생님, 서학 책은 다 읽어보셨겠지요?”
“그렇다네.”
“어떠하던가요?”
“……딱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군.”
“이제 우리 조선에서도 천주님을 믿고 공경하는 예를 갖춰야할 텐데 법도를 알 수 없으니…… 그렇다고 서양 신부님을 모셔올 수도 없고. 중국 북경엔 서양 신부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모여서 예를 올리는 천주당도 지어져 있고요.”
권철신은 말이 없었다. 그런 권철신의 무거운 표정을 살피던 이벽이 새벽 산사의 풍경소리들 뒤로 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천주공경가’를 지어야겠어요.”
그때 이벽보다 네 살 아래인 정약전이 어느새 다가와 기다렸다는 듯 거들었다.
“옳습니다. 꼭 필요하겠지요, 사형.”
세례를 받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이벽은 동지사(冬至使,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이승훈은 서양 선교사에게 필담으로 교리 교육을 받은 뒤,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 최초의 영세자였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온 이승훈은 명례방(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세례식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었다.
정식으로 천주교인이 된 이벽(세례명, 세례자 요한)은 본격적으로 전도에 나섰는데, 스승 권철신의 집을 찾은 것은 1784년 9월이었다. 감호의 가을은 넉넉하고 고즈넉했다.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은 권철신을 신자로 만들면 힘들이지 않아도 교세를 확장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한 이벽의 공격은 거침없었다.
“지난 봄, 명례방에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가환, 이기양 어르신께서도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인정했습니다. 이제 주위 모든 분들이 천주를 모시게 됐습니다. 스승님께서도 그만 결단을 내리시지요.”
마흔아홉 살의 권철신은 눈을 감았다. 동생 권일신은 즉각 자신을 내려놓고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였다. 하비에르란 세례명으로 천주를 모시는 사람이 된 뒤 지금은 이벽이랑 어울려 다니며 전도에 여염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한평생 유교를 연구하는데 몸을 바친 권철신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벽이 얘기하던 진리를 받아들였다.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던 날, 권철신은 눈물을 흘렸다. 허전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희한한 눈물이었다. 세례를 주던 이벽의 눈에서도 감사의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식으로 천주교인이 된 이벽(세례명, 세례자 요한)은 본격적으로 전도에 나섰는데, 스승 권철신의 집을 찾은 것은 1784년 9월이었다. 감호의 가을은 넉넉하고 고즈넉했다.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은 권철신을 신자로 만들면 힘들이지 않아도 교세를 확장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한 이벽의 공격은 거침없었다.
“지난 봄, 명례방에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가환, 이기양 어르신께서도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인정했습니다. 이제 주위 모든 분들이 천주를 모시게 됐습니다. 스승님께서도 그만 결단을 내리시지요.”
마흔아홉 살의 권철신은 눈을 감았다. 동생 권일신은 즉각 자신을 내려놓고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였다. 하비에르란 세례명으로 천주를 모시는 사람이 된 뒤 지금은 이벽이랑 어울려 다니며 전도에 여염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한평생 유교를 연구하는데 몸을 바친 권철신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벽이 얘기하던 진리를 받아들였다.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던 날, 권철신은 눈물을 흘렸다. 허전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희한한 눈물이었다. 세례를 주던 이벽의 눈에서도 감사의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7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사단이 벌어졌다. 그동안 동생 권일신은 조선 천주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교단을 이끌던 이벽이 갑작스레 죽은 이후 권일신이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어 있었는데, 1791년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전라도 진산에 사는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우는 일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였고, 동생 권일신도 교주로 지목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동생이 체포되자 늙은 어머니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감호 들판을 배회했다. 그리고 감호정에 올라 남한강 저 너머를 바라보며 연신 옷깃을 적셨다. 보다 못한 권철신은 봇짐을 싸서 한양으로 올라갔다.
곤장을 맞고 감옥에 갇혀있는 동생을 면회하자,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천주님께서는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형님께서는 천주님을 배신하지 마시고 오래오래 사시다가 나중에 천국에서 만납시다. 형님, 저는 살 가망이 없습니다. 늙으신 어머님, 잘 보살펴 드리세요. 죄송합니다.”
동생 권일신은 감옥에서 나와 충청도 예산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장독(곤장을 맞아 생긴 상처의 독)이 올라 죽고 말았다. 마흔아홉 한창 나이였다. 동생이 죽고 나자 감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늙은 어머니도 한이 맺혀 돌아가시고, 그렇게나 분주하게 드나들던 젊은 유학자들도 발길을 끊었다.
동생이 체포되자 늙은 어머니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감호 들판을 배회했다. 그리고 감호정에 올라 남한강 저 너머를 바라보며 연신 옷깃을 적셨다. 보다 못한 권철신은 봇짐을 싸서 한양으로 올라갔다.
곤장을 맞고 감옥에 갇혀있는 동생을 면회하자,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천주님께서는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형님께서는 천주님을 배신하지 마시고 오래오래 사시다가 나중에 천국에서 만납시다. 형님, 저는 살 가망이 없습니다. 늙으신 어머님, 잘 보살펴 드리세요. 죄송합니다.”
동생 권일신은 감옥에서 나와 충청도 예산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장독(곤장을 맞아 생긴 상처의 독)이 올라 죽고 말았다. 마흔아홉 한창 나이였다. 동생이 죽고 나자 감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늙은 어머니도 한이 맺혀 돌아가시고, 그렇게나 분주하게 드나들던 젊은 유학자들도 발길을 끊었다.
1801년 봄
꼭 십년 전 그렇게 동생이 떠나갔는데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는가. 66살의 늙은 유학자 권철신은 눈을 떴다. 사랑방 앞의 살구꽃은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독한 향기를 마음껏 들이킨 권철신은 이내 체념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뒤 예상대로 관헌들이 들이닥쳤다. 십년 전 동생을 고발한 목만중(睦萬中,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주도함) 등이 자신과 아들 권상문, 그리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 등 많은 천주교인들을 고발했다.
“사학죄인 권철신은 포박을 받아라!”
권철신은 아들 권상문과 함께 오라를 받고 한양으로 압송되어갔다.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면서 권철신은 이제 마지막이 될 감호의 구석구석을 마음속으로 돌아보았다.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부친 때부터 수십 명의 가족들이 웃으면서 함께 모여 살던 정든 집. 집 뒤의 대나무, 소나무 우거진 갈산. 그리고 늘 말없이 흐르던 남한강. 그 강변의 감호암과 감호정.
며칠 뒤 예상대로 관헌들이 들이닥쳤다. 십년 전 동생을 고발한 목만중(睦萬中,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주도함) 등이 자신과 아들 권상문, 그리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 등 많은 천주교인들을 고발했다.
“사학죄인 권철신은 포박을 받아라!”
권철신은 아들 권상문과 함께 오라를 받고 한양으로 압송되어갔다. 오랏줄에 묶여 끌려가면서 권철신은 이제 마지막이 될 감호의 구석구석을 마음속으로 돌아보았다.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부친 때부터 수십 명의 가족들이 웃으면서 함께 모여 살던 정든 집. 집 뒤의 대나무, 소나무 우거진 갈산. 그리고 늘 말없이 흐르던 남한강. 그 강변의 감호암과 감호정.
한양에 도착한 권철신은 국문을 받았다. 혹독한 형벌에도 그는 시종일관 천주를 배신하지 않았다. 함께 체포된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홍낙민, 최필공 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형이 집행되기 전에, 십년 전 동생이 그랬듯이 그도 장독으로 죽었다. 함께 국문 받은 정약전, 정약용 등은 귀양길에 올랐다. 그의 아들 권상문도 이듬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권철신의 죽음을 가장 애석하게 생각한 것은 18년 동안의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다산 정약용이었다. 녹암 권철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호 이익의 학문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했다.
권철신의 죽음을 가장 애석하게 생각한 것은 18년 동안의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다산 정약용이었다. 녹암 권철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호 이익의 학문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했다.
(끝)
스토리원고 | | | 채종인 작가 |
연구원고 | | | 김세호(성균관대) |
일러스트 | | | 컬처랩 |
참고문헌
『권철신과 감호암』 김세호.
『한국교회사 숨은 이야기』 정민. 가톨릭평화신문.
『녹암 권철신 묘지명』 정약용. 여유당전서.
『흑산』 김훈. 학고재.
『권철신과 감호암』 김세호.
『한국교회사 숨은 이야기』 정민. 가톨릭평화신문.
『녹암 권철신 묘지명』 정약용. 여유당전서.
『흑산』 김훈. 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