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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실학과 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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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전시기간 2017-04-17(월) ~ 2017-08-27(일)
장소 1층 실학박물관 기획 실학박물관 주최주관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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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실학박물관(관장 장덕호)에서는’여성, 실학과 통하다’를 주제로 기획 특별전을 개최한다.
전시 일정은 2017. 4. 17(월)~8.27(일)까지다.
조선시대 ‘여성’이라 하면 ‘여필종부’ ‘삼종지도’ ‘현모양처’ 등 유교 윤리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 대다수의 여성들은 생활 속에서 실과 바늘을 가까이 했고, 붓과 벼루는 멀리한 채 삶을 살았다. 그러나 붓과 벼루로 상징하는 학문이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에도 “나의 소원은 남자로 태어나 원 없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라는 조선시대 어느 여인의 소망처럼 생활 속에서 실천적 학문으로 자신을 표현한 여성들도 있었다.
이번 전시에는 조선 여인들의 삶을 알리기 위해 많은 여성들을 소개한다. 주요 인물들은 청상과부로 수절하며 시아버지 채제공의 전기를 쓴 정약용의 누이 정씨부인,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낸 조선의 어머니 장계향, 여성문인 김호연재와 남정일헌, 14세의 나이로 홀로 금강산을 오른 김금원, 열녀되기를 거부한 풍양 조씨,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과 강정일당, 태교신기를 편찬한 이사주당과 「규합총서」의 이빙허각 등이다. 이들은 조선시대 문학, 성리학, 생활학문의 연구를 통해 여성으로서 주체성을 찾고자 한 인물들이다.
사실 ‘실학’의 연구는 조선사회의 개혁담론과 근대성의 문제에 천착하면서 ‘여성’과는 다소 거리를 두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에 들어와 생활사와 문화사의 연구가 확산되면서 조선시대 여성들이 남긴 실용적인 학문을 학계에서 주목하였고, 관련 자료의 발굴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여성과 실학의 접점은 실용학문의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최초로 태교 관련 내용을 집대성한 이사주당(李師朱堂, 1739~1821), 여성백과사전인 「규합총서」의 편찬자 이빙허각(李憑虛閣, 1762~1822)은 여성이 가정에서 담당해 왔던 육아·음식 등 가사업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구전과 경험에 의해 전해내려왔던 생활의 지혜는 19세기에 이르러 두 여성 실학자에 의해 학문적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조선 여성들의 삶을 마음으로 느끼고, 여성 실학자들이 이룩한 학문적 결실을 체험해 보기 바란다. 이를 통해’실학과 여성’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이해가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개막식 일정일 시2017. 4. 17(월) 14:00장 소실학박물관 로비참석대상유관단체, 실학자 후손 등 100명 내외□ 전시내용1부 : “조선시대 여자로 산다는 것”○ 부덕을 강조한 여성 교육
조선시대 여성들은 「소학」과 「삼강행실도」를 읽으며 순종이라는 부덕을 쌓고 규방의 여자로서 법도를 따르며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가정 교육이 전부였던 시절, 여자는 길쌈을 비롯하여 음식과 의복을 장만하고 제사를 살필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특히 양반 가문에서는 계녀서가 있어 여아의 교육에 활용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서 가장 큰 덕목은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는 것이었다. 조선의 어머니로 칭송받는 안동 장씨(장계향)는 자식으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일생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아들 이현일이 이조판서가 되면서 ‘정부인 안동장씨’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장계향’이라는 이름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없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한 여성으로 당당히 이름을 남긴 것이다.
○ 시아버지 채제공의 한글전기를 펴낸 정씨부인
조선시대에 시아버지가 남긴 글을 한글로 번역하여 집안 여성들이 보고 그 훌륭함을 기리게 한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다산 정약용의 서매인 정씨부인은 재상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과 혼인하였는데, 혼인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는 불행을 당했다. 19세의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정씨부인은 일생 수절하며 시아버지를 정성스레 섬겼으며, 시아버지 채제공이 남긴 기록을 모아 상덕총록이라는 이름의 한글전기집을 펴냈다.
상덕총록은 ‘재상 채제공의 덕을 모두 기록한다’는 뜻이다. 채제공의 행적과 사도세자와 관련된 궁중비사 등이 기록되어 있다.2부 : 시와 학문으로 ‘나’를 표현하다○ 규방 속 시문 활동
여성이 학문이나 시를 배우기도 어려웠지만 설사 재능이 있어 작품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기란 더욱 어려웠다. 평생을 규방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운명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자신의 내면을 시로 표현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성시인 기각, 오랜 수절 생활을 시로 승화한 김호연재와 남정일헌 등이 대표적이다.
평생 절로 남아의 뜻이 있으되
다만 안방 가운데 여인네 머리쓰개 쓴 것을 탄식하노라
– 기각
○ 금강산을 여행한 김금원과 삼호정시사
18세기 이후 문화 향유 계층이 신분을 뛰어넘어 확대되면서 재능 있는 여성들의 문화 활동이 꽃피기 시작했다. 최초의 여성문예활동그룹 ‘삼호정시사’가 대표적이다. 운초와 죽향 이외에도 14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금원, 가야금 솜씨가 빼어난 죽향의 언니 죽엽, 시를 잘 지은 금홍, 죽향처럼 시화에 이름난 경혜 등이 그들이다. 모두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다는 점 이외에도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기녀 혹은 서녀 출신 소실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기녀라는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조선의 문화적 풍경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알겠다. 하늘과 땅이 아무리 크다 해도
내 한 가슴속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方知天地大 客得一胸中
– 김금원의 <호동서락기> 중에서
○ 여성 성리학자의 탄생 – 여자도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 가운데 좋은 시나 글을 남긴 인물은 많지만, 성인이 되는 공부에 목표를 두고 정진한 경우는 아주 드물다. 여성성리학자인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성품은 애초에 남녀 간에 차이가 없다고 하였고, 성인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며, 사람은 누구나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은 조금 앞선 시기에 살았던 임윤지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강정일당은 임윤지당에게서 여성 선비의 모습을 보았고, 그가 지은 책에서 큰 힘을 얻었다. 하늘에서 받은 선한 성품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차이가 없으며 여성들도 노력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3부 : 열녀 담론○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열녀론
과부는 외로운 곳에서 아주 깊은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여인들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녀함양박씨전> 서문에 등장하는 어느 늙은 과부는 평생 잠이 안올때 마다 굴려서 테두리가 다 낡아버린 동전을 자식에게 보여준다. 박지원은 수십년을 수절한 이 늙은 과부야 말로 과연 열녀라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수절하는 열녀는 너무나 흔해서 자결할 정도의 사연이 아니고서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박지원은 일생동안 총 3번의 열녀전을 썼다. 그는 두 번째 쓴 열녀전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망설이고 있는 여성의 고뇌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열녀의 고통을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조선시대 열녀 풍속에 대한 고민이자 비판이었다.
1796년 57세에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중 세 번째로 쓴 열녀전이 바로 「열녀함양박씨전」이다. 이 열녀전에서 박지원은 함양박씨가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 뒤에 약을 먹고 자결한 전말을 소개했다. 박지원은 함양박씨를 열녀라고 찬탄하면서도 그 여성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사정을 헤아렸다.
잔인한 자결풍속에 대한 회의론은 박지원뿐만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도 특별한 이유없이 남편을 따라 죽는 자결 풍속에 일침을 가했다.
“자결이 천하의 가장 흉한 일인데도 높은 사람들은 그 마을에 정표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아들이나 손자들까지도 요역을 감해 주고 있다. 이는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을 서로 사모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다산 정약용
○ 열녀가 되지 못한 풍양 조씨의 고백
남편을 따라 죽는 여성을 열녀라 칭송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여성들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후반 풍양 조씨(1772~1815)는 혼인한 지 6년 만에 동갑내기 남편과 사별하자 그녀 역시 남편을 먼저 보낸 죄인된 심경으로 생사를 고민하였다.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설득으로 살아남기로 결정한 조씨는 20여 년이 지난 후 자신의 속마음을 「자기록(긔록)」으로 남겼다. 풍양 조씨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열녀가 되지 못한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내 생목숨을 끊어 여러 곳에 불효를 하는 것과 참담한 정경을 생각하니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모진 목숨을 기꺼이 받아들일지언정 다시 양가 부모님에게 참혹한 슬픔을 더하랴 하여 금석같이 굳게 정한 마음을 문득 고쳐 스스로 살기를 정했다.”
– 「자기록」4부 : 여성 실학자의 탄생○ 이사주당, 세계 최초의 태교서를 쓰다
조선시대에 임신에 관한 관심은 대부분 태아의 성별로 집중되었다. 아들을 낳아 가문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태아의 성별 대신 태아의 인성 교육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 있다. 바로 이사주당(李師朱堂, 1739-1821)이다. 「언문지」를 비롯하여 1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실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유희(柳僖)가 그녀의 아들이다.
이사주당은 1800년에 「태교신기胎敎新記」라는 한문으로 쓴 태교 지침서를 내놓았다. 이 책을 쓸 당시 사주당의 나이는 환갑을 넘긴 62세였다. 「태교신기」에서 이사주당은 여성의 행실뿐만 아니라 남편의 행실도 강조하였다. 태교가 여성만의 일이라는 편견을 깬 것이다.
1801년 아들 유희는 어머니 사주당의 글을 10편으로 나누어 주를 달고 우리말로 해석한 언해본을 펴냈다. 오늘날 전해지는 「태교신기」는 유희의 재편집본이다.
○ 이빙허각, 여성의 생활경제를 저술에 담다
여성실학자 이빙허각(李憑虛閣, 1759-1824)은 명문가 출신으로 15세에 3살 연하의 서유본(徐有本, 1762~1822)과 혼인했다. 서유본의 아버지는 실학자 서호수이며, 친형은「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저자 서유구이다. 「태교신기」의 저자 이사주당은 빙허각의 외숙모가 된다.
빙허각은 51세인 1809년에 「규합총서」를 완성했다. ‘규합’은 여성이 머무는 거처 또는 여성을 의미한다. 「규합총서」를 다시 풀이하면 ‘가정학총서’가 된다. 당시 의식주에 대한 탐구는 여성이기에 갖는 관심이 아니었다. 성리학에서 출발해 실용 학문으로 외연을 넓혀가던 실학자들이 주의 깊게 연구한 대상 중 하나였다.
이빙허각이 「규합총서」에서 구축한 지식 속에는 당시 조선후기 새로운 학풍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빙허각은 「규합총서」를 한글로 썼는데 인용된 저서만 80여 종에 달한다. 「규합총서」는 빙허각이 살아 있을 때부터 친척들에게 알려져 필사되었고, 사후에도 계속 필사되어 19세기 후반 가정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힌 책이 되었다.「규합총서」의 구성
① 주사의 – 술·음식만들기 등
② 봉임측 – 옷만들기·물들이기·길쌈하기·수놓기·누에치기 등
③ 산가락 – 밭일·꽃심기·가축기르기 등
④ 청낭결 – 태교·육아법·응급처치법
⑤ 술수략 – 좋은 방향 선택·길흉·부적·귀신 쫓는법·재난방지법 등대표유물윤덕희의 독서하는 여인, 18세기, 비단에 색, 20×14.3cm /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여성에게 규방칠우는 가까워도 문방사우는 멀었던 시절, 한 여인이 책을 읽고 있다. 바느질과 길쌈, 부엌일에서 여성의 부덕을 찾았던 시절이라해도 배움을 향한 마음은 같지 않았을까. 이 그림은 문인화가 윤덕희(1685~1776)의 작품이다. 아버지가 윤두서이고 아들이 윤용으로 삼대가 화업을 이은 명문이다. 손을 짚어가며 한자 한자 정독하는 여인의 모습이 아름답다.태교신기언해, 조선 / 실학박물관 소장이사주당(李師朱堂)이 1800년(정조 24)에 아기를 가진 여자들을 위하여 한문으로 글을 짓고, 아들인 유희(柳僖)가 음의(音義)와 언해를 붙여 1801년(순조 1)에 발간한 책임. 최초의 태교전문서이자 여성이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비판적 사고로 태교 이론과 실제를 체계적으로 정립함규합총서, 조선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빙허각이 아녀자를 위해 음식, 옷, 밭일, 태교, 재난방지법 등을 엮은 책으로 여성생활백과라고 할 수 있음.
특별전시
여성, 실학과 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