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과 회화/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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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2.21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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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암 강세황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17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30.5×35.5cm
명대 오파의 거장 석전 심주의 화법을 방한 것으로 밝혔는데, 모티프 자체는 남종문인화풍의 교과서적 화보인《개자원화전》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를 베끼는 차원이 아니라, 맑고 상쾌한 느낌이 드는 새로운 화면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전경의 솟아오른 언덕에는 두 그루 오동나무가 잎을 무성하게 드리우고 있고, 그뒤 중경에는 사립문 너머에 대숲과 파초를 배경으로 초막이 있고, 마루에 나와 앚아 더위를 식히고 있는 문인이 보인다.
앞마당을 쓸고 있는 시동의 등 뒤로는 무너질 듯한 커다란 절벽이 배치되었는데, 안쪽으로약간 기운 오동나무와 호응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로 멀리 먼산의 실루엣이 펼쳐지며 시선을 끌어당기는데, 형성한 뒤, 오동나무 오른쪽으로 펼쳐진 산의 능선을 따라 그 너머 여백의 공간으로 시선을 이끌어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물기 많은 담묵 위에 청록색 담채가 가해진 오동나무, 푸른색과 갈색 담채를 몰골법으로 처리하여 시원스런 대비가 인상적인 원산 처리 등과 어우러지면서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다.
따라서《개자원화전》에 나오는 모티브를 원용했으면서도 창작으로서의 새로운 느낌을 성공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원숙한 솜씨로 인해 한때 만년작으로 보기도 했으나, 첨재가 강세황(姜世晃;1713~91)의 초년기에 사용된 호임이 입증됨으로써 1750년대 작품으로 보고 있다.(박효은)
▶ 표암 강세황 <피금정(披襟亭)>
1788, 종이에 수묵 101.0×71.0cm
표암(豹菴) 강세황은 1788년 9월 9일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그 해 가을 맏아들인 이 심양부사로 임명되어 관사에 가 있다가, 정조의 어명에 따라 동해안 지역 그리고 내금강을 사생하러 들어가려고 회양에 들른 김응환, 김홍도 등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금강산 유람을 기록한 것이 <유금강산기>이며, 여행에서 그린 그림이 유명한 <풍악장유첩>이다. 표암은 바로 이때 회양 가는 길목인 금성의 피금정에 들른 것 같다.
” 1788년 가을 나는 피금장에 들렀다.
강 언덕 그늘 짙은 고목이 가지런한데, 가던 수레 멈추니 석양이 나지막하다.
바빠서 옷깃 헤치고 앉아 있을 겨을 없으니,
후에 난간에 기대어 짧은 시구 지을 것을 기약해보네.
회양의 와지헌에 와서 앉아 기억을 더듬어 이 그림을 그린다.”
이 시는 강세황의 문집《표암유고(豹菴遺稿)》에도 나온다.
화면을 보면 정선 같은 이전의 화가들이 그린 피금정 모습과 사뭇 다르다.
즉 정선이 누대와 같은 피금정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면 이 그림에는 정자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자의 모습은 김홍도의《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가운데에 있는 <피금정> 장면과 유사하다.
강세황이 1789년에 그린 또 다른 <피금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도 구불구불 올라간 용의 허리 위에 올라앉은 듯한 누대 형태의 피금정이 아니라 화면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귀퉁이 부분에 작에 그려진 강변의 정자와 그 쪽에서 바라본 산이 등장한다.(유홍준)
▶ 표암 강세황 <산수대련(山水對聯)>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담채, 각 58.5×33.5cm
강세황의 중기작으로 남종화풍(南宗畵風)을 바탕으로 한 시화 일치(詩畵一致)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폭은 예찬(倪瓚) 풍의 빈 정자가 강에 인접한 채 쓸쓸하게 서 있는 전경을 강건너 멀리 안개에 감싸인 채 고즈넉한 사람들의 거처와 대비 시켰고, 다른 한 폭은 단풍진 강산 어딘가에서 기러기 소리라도 들릴 듯한 드넓은 강변을 돌아 멀리 있는 마을을 찾아가는 사람을 그렸다. 두 폭 모두 저녁 나절의 적막하고 고요한 느낌을 전하기 위해 점잖고 조용한 필선으로 간략하게 그림으로써 성글고 맑은 느낌을 자아내는데 성공하였다.
” 들물은 성근 숲 너머로 흐르고 빈 정자느 저녁 바람을 맞고 있네.
저는 나귀 그림자 속에 푸른 산이 저물어가고 끊어지는 기러기 울음소리 가운데
붉은 단풍 어우러진 가을이로다.”
– 박효은 –
▶ 다산 정약용 <행서>
19세기 초반, 종이에 먹. 24.5×27.0cm
강진에 유배중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쓸쓸한 심정이 애절하게 나타나있는 소품이다. 깔끔한 다산 특유의 필치에 강약의 리듬이 더해져 글의 내용이 더욱 심금을 울린다.
” 9월 12일밤, 나는 동암에 있었다. 우러러 하늘을 보니 하늘은 적막하고 드넓으며, 조각달이 외롭고 맑았다. 떠 있는 별은 여덟아홉에 지나지 않고, 앞뜰엔 나무 그림자가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옷을 주워 입고 일어나 걸으며 동자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니, 그음향이 구름 끝까지 뚫고 나갔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찌든 창자를 말끔히 씻어버리니, 더 이상 세상의 광경이 아니었다.”
– 유흥준 –
▶ 다산 정약용 <시첩 – 성화(聖華)를 기리며>
1. 서종은 지명으로 약근군 서북쪽 사오십리에 있다.
2. 심씨집에서는 온갖 꽃을 기르고 있는데, 특히 국화는 48종이나 된다.
3. 산인은 평생 소설산에 있는 북쪽 골짜기에 살았다.
4. 두번째 구절은 삼연 김창흡의 시를 사용한 말이다. 5. 문암 포구로부터 동쪽으로 10리 들어가면 나의 산장이다.
6. 황효수는 여주강이고, 녹효수는 홍천강이다.
7. 차마 옛터를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온 집안이 남쪽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
8. 성화는 올해 52세다.
9. 성황에겐 위로는 늙은 어버이가 있고, 아래로는 병든 자식이 있다.
10. 태수는 우천의 별명이고, 종산은 용진의 북쪽에 있다.
18~19세기,모시에 먹. 17.5×121.0cm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중 자신의옷이 닳아 헤지면 그것을 잘라 시첩을 만들어 사용하곤 했다. 이 시첩은 12폭으로 꾸며진 것인데 지금은 횡액으로 다시 표구되었다. 바닥에는 풀을 먹여 다리미로 다린 흔적이 남아 있다.
시첩의 내용은 고향인 남양주 능내리와 벗 성화를 생각하며 지은 칠언절구 10수이다. 각 시마다 시구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았다. 발문은 다산이 27년 전에 성화를 지은 것으로 비록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진실을 담은 것이라고 하며, 글 마지막은“이 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산 초부(樵夫)가 쓰다”라는 처연한 글귀로 마무리했다.
이 시첩은 다산의 해서가 얼마나 단아하고 흐트러짐이 없으면서도 이지적이고 해맑은 멋이 서려 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 단원 김홍도 <혜능상매도(蕙能賞梅圖)>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5×41.5cm
중국 명대 도석인물화본인 <홍씨선불기종(洪氏仙佛奇縱)>에서 선종 6대조 혜능 의 도상을 빌려다 그린, 단원 김홍도(1745~1805경) 50대의 걸작이다. 멍하니 앉아 삼매경에 든 혜경을 두 마리 까치가 앉은 고매 위에 포치하여 유.불의 상징을 복합시켜놓았는데, 역시 김홍도다운 멋스러운 발상이다.
선승 혜능이 유사 들의 매향을 같이 즐긴다는 내용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화제시에 “암향부동어제천(暗香浮動於諸天)”이라 썼지만, 고매에는 꽃망울조차 달려 있지 않다. 그 매향을 지루하게 기다리는혜능의 삼매경 속이 매화 가지처럼 시커멓게 엉켜 있는 듯하다.(이태호)
▶ 단원 김홍도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0 ×37.0cm
김홍도는 표암 강세황에게서 문인 삶의 멋과 취미를 습득했는데, 표암의 평에 따르면 김홍도가 신선 같은 용모를 타고났다고 한다. 또 당대 최고의 화원으로, 문사들과 어울려 시회아집을 가졌을 만큼 그림뿐 아니라 시.서.악 모두 수준급이었다.
“흙벽에 종이창을 내고 종신토록 포의 차림으로 시와 음악을 즐기면” 가장 좋겠다는 글의 내용을 풀어 그린 작품이다. 방건(方巾)을 쓰고 정좌한 채 당비파(唐琵琶)를 켜는 인물의 모습은 당시 문인들의 취향이자 김홍도 자신이 지향하던 풍류를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50대 어느 시기의 김홍도 자화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인물의 주변에 배치된 파초, 붓과 벼루, 칼, 생황, 호리병, 중국골동품, 서책과 화선지 등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신선의 생활상을 읽게 해준다.
다양한 기물들을 복잡하게 늘어놓은 듯하면서도 삼각형 구도로 적절히 갈무리해놓은 김홍도의 화면 운영력이 돋보인다. 단숨에 쓱쓱 그리는 듯한 김홍도 50대 절정기의 무르익은 필묵(筆墨) 으로 풍류 정신을 확실히 구현해낸 걸작이다.(이태호)
▶ 초정 박제가 <화첩 – 의암관수도(倚岩觀水圖)>
▶ 초정 박제가 <화첩 – 산수도(山水圖)>
▶ 초정 박제가 <화첩 – 어락도(漁樂圖)>
▶ 초정 박제가 <화첩 – 야치도(若稚圖)>
▶ 초정 박제가 <화첩 – 야치도제시(若稚圖題詩)>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경)는 잘알다시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이다. 청조(淸朝)의 신문물을 수용하여 부국 과 백성들의 생활 향상을 꾀하자는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을 주장했다.
서얼 출신인 그를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 으로 발탁했을 만큼 뛰어난 문사 였다. 박제가는 네 번의 연행을 통해 청나라의 학문과 문예를 익혔고, 나빙. 옹방강 등 중국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시 . 서 . 화의 문인 취미를 길렀고, 문인으로서 전인적 교양을 갖추어나갔던 것이다. 한편 그러한 교양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 . 정치인 . 외교관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위상을 다졌을 것이다.
이 화첩에 담긴 네 점의 그림과 한 점의 제시는 박제가의 예술적 수준을 가늠하는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도판으로만 소개된 적이 있는 이 화첩이 전시 공간에 선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제가가 추구했던 신분 차별의 타파와 상공업 진흥에 대한 소신이 담겨 있는 그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평범한 소재를 취하여 여기 화가다운 소담한 솜씨를 보여준다.
우선 <의암관수도>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모사해본 듯 단원 화풍에 근사하다.
<산수도>는 깔끔한 수묵담채 로 평범한 산마을 풍경을 담고 있는데, 표암 강세황의 화풍이 느껴지자.
<어락도>는 장한종 의 화풍을, 네 점중 가장 활달한 필치로 그린 <야치도>는 다시금 단원풍을 연상시킨다.
<야치도제시> 행서 오언시 는 표암의 서풍 인 듯하면서도 분방한 힘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선배 문인 화가인 강세황보다 회화적 견실함을 이룬 듯하다. 이 화첩의 맑고 활달한 서화풍을 보면, 남의 그림을 참고로 그려보면서 부담 없이 즐겼던 대학자다운 박제가의 여유와 건전한 인간미를 읽을수 있다. 또한 <어락도>에 쓴 <장자>의 고사, <의암관수도>에 쓴 칠언시 “귀는 물에 몸은 돌에 의지했는데, 세 사람이 있지만 마음은 하나다” 등은 박제가가 주역과 노장의 사상에도 심취했음을 짐작케 한다.
서화첩 의 마지막<야치도제시> 에는 관리 생활을 하면서 내심 꿩처럼 은둔처를 찾고 싶어했던 박제가의 마음자리가 투영되어 있다. ‘정유’ 는 박제가의 또 다른 아호이다.
<의암관수도>에 쓴’수기(修基)’는 박제가의 자이다.(이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