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반계수록, 공정한 나라를 기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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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10.19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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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 2020.10.19~2021.2.28
전시장소 : 실학박물관 기획전시실
공동주최 : 실학박물관 · 부안군
[반계수록] 저술350주년이자 간행 250주년을 기념하여 실학의 비조로 손꼽히는 반계 유형원의 사상과 업적을 조망하는 기획전시를 통해 어려운 시기 국가의 미래지향적 가치를 현시하고자 합니다.
전시장소 : 실학박물관 기획전시실
공동주최 : 실학박물관 · 부안군
[반계수록] 저술350주년이자 간행 250주년을 기념하여 실학의 비조로 손꼽히는 반계 유형원의 사상과 업적을 조망하는 기획전시를 통해 어려운 시기 국가의 미래지향적 가치를 현시하고자 합니다.
○ 기획전은 크게 4부로 구성했습니다. .
▲ 1부 <청백리의 후손, 집안의 불행과 국가의 치욕을 겪다>는 유형원의 삶의 궤적을 다룬다. 그는 2살 때 아버지를 정쟁으로 잃고, 소년기에 병자호란의 전란을 겪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국가적 치욕은 소년 유형원을 각성하게 했으며 책임의식을 높였다. 왜 나라가 치욕을 겪고, 백성의 재앙은 그치지 않는가?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이었다.
▲ 2부 <개혁의 땅, 부안에서 필생의 역작을 쓰다>는 유형원의 학문공간을 연출했다. 반계서당이 위치한 부안군은 남도에서도 손꼽히는 풍경을 자랑한다. 유형원이 바라보았던 이 공간을 전시에서는 영상으로 연출했다. 평생 그를 괴롭혔던 폐병의 치유와 젊은 시절부터 꿈꾸었던 폐해의 개혁을 구상한 지역으로 부안을 표현했다. 이곳 부안에서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집필하여 49세에 완성했다(1670).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형원은 5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 3부 <공정한 나라를 기획하다>는 19년에 걸친 유형원 필생의 역작인 <반계수록>의 구성을 살핀다. 유형원은 나라가 쇠약해진 원인이 사욕에 의한 법과 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국가의 공공성 회복’이야 말로 근원적이고 긴급한 과제였다. 그 처방전이 바로 ?반계수록?이었다. 토지사유를 비판하고 대안으로 공전公田 제도를 제시했고, 나아가 과거와 교육, 관직제도, 녹봉제, 군현제 등의 전반적인 국가개혁 담론을 주장했다. 단순히 이상적인 구호가 아닌 실행을 위한 세부적인 절차도 갖추었다. 유형원은 자신의 제도 방안이 지극히 ‘공정’해 오랫동안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다.
▲ 4부 <100년의 기다림, 당파를 뛰어넘어 실학을 일으키다>은 유형원 사후 <반계수록>이 국가에서 쓰일 경세서로 인정받는 과정을 다루었다. 사후 100여년이 걸린 재평가의 작업에서 특별한 점은 유형원의 개혁안이 국왕인 영조와 정조를 비롯하여 당파를 넘어 모두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100여년만에 임금의 명으로 간행되어 당대의 대표적인 경세의 저술로 공인되었다.
▲ 유형원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근본적 처방은 후대 학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유형원의 경세론을 디딤돌로 하여, 이익·홍대용·박지원·정약용 등이 경세론을 개진했다. 그래서 유형원을 ‘실학의 비조’라 부른다.
▲ 1부 <청백리의 후손, 집안의 불행과 국가의 치욕을 겪다>는 유형원의 삶의 궤적을 다룬다. 그는 2살 때 아버지를 정쟁으로 잃고, 소년기에 병자호란의 전란을 겪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국가적 치욕은 소년 유형원을 각성하게 했으며 책임의식을 높였다. 왜 나라가 치욕을 겪고, 백성의 재앙은 그치지 않는가?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이었다.
▲ 2부 <개혁의 땅, 부안에서 필생의 역작을 쓰다>는 유형원의 학문공간을 연출했다. 반계서당이 위치한 부안군은 남도에서도 손꼽히는 풍경을 자랑한다. 유형원이 바라보았던 이 공간을 전시에서는 영상으로 연출했다. 평생 그를 괴롭혔던 폐병의 치유와 젊은 시절부터 꿈꾸었던 폐해의 개혁을 구상한 지역으로 부안을 표현했다. 이곳 부안에서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집필하여 49세에 완성했다(1670).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형원은 5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 3부 <공정한 나라를 기획하다>는 19년에 걸친 유형원 필생의 역작인 <반계수록>의 구성을 살핀다. 유형원은 나라가 쇠약해진 원인이 사욕에 의한 법과 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국가의 공공성 회복’이야 말로 근원적이고 긴급한 과제였다. 그 처방전이 바로 ?반계수록?이었다. 토지사유를 비판하고 대안으로 공전公田 제도를 제시했고, 나아가 과거와 교육, 관직제도, 녹봉제, 군현제 등의 전반적인 국가개혁 담론을 주장했다. 단순히 이상적인 구호가 아닌 실행을 위한 세부적인 절차도 갖추었다. 유형원은 자신의 제도 방안이 지극히 ‘공정’해 오랫동안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다.
▲ 4부 <100년의 기다림, 당파를 뛰어넘어 실학을 일으키다>은 유형원 사후 <반계수록>이 국가에서 쓰일 경세서로 인정받는 과정을 다루었다. 사후 100여년이 걸린 재평가의 작업에서 특별한 점은 유형원의 개혁안이 국왕인 영조와 정조를 비롯하여 당파를 넘어 모두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100여년만에 임금의 명으로 간행되어 당대의 대표적인 경세의 저술로 공인되었다.
▲ 유형원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근본적 처방은 후대 학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유형원의 경세론을 디딤돌로 하여, 이익·홍대용·박지원·정약용 등이 경세론을 개진했다. 그래서 유형원을 ‘실학의 비조’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