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경기도 실학박물관(관장 장덕호)에서는‘경기 청백리’를 주제로 특별전을 개최한다. 전시 일정은 2016. 5. 23(월)∼9.18(일)이며 관련 유물 41점을 중심으로 진행한다.
대표유물로는 조선중기 청백리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의 문집인《청강선생집淸江先生集》과 조선시대 청백리의 명단이 수록된 《청선고淸選考》 등이다.
이번 특별전은 실학박물관의 청렴 연수 프로그램인‘다산 공·렴 아카데미’의 진행 과정에서 기획되었다. 실학박물관의 공직·공무원 청렴 연수는 매년 2,000명~3,000여명이 참여하여 전국 최고의 성인 교육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고, 올해 안에 누적 참가자 1만 명을 돌파할 예정이다.
다년간의 교육 과정에서 실학박물관은 참가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연수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선해 왔다. 특히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보이는 공(공정)·렴(청렴) 정신을 실천했던 인물들에 대한 사례 발굴과 이를 교육콘텐츠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요청이 많았다. 이에 박물관에서는 학술조사사업의 일환으로 2014년 겨울 《경기 청백리를 찾아서》라는 조사 보고서를 간행하였고, 본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
경기도는 명실상부 청백리의 고장이었다. 조선 태조~순종 때까지 27대 왕이 있었지만, 왕대마다 청백리를 선정한 것은 아니었다. 《청선고淸選考》·《전고대방典故大方》 등에 수록된 청백리는 218명으로, 이 중 오늘날 경기도에 지역적 연고가 있는 인물은 60여명에 이른다. 맹사성, 황희, 유관, 이원익, 이항복, 부자父子 청백리인 이제신·이명준 등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인물들의 유적이 경기도에 자리해 있다.
청백리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16세기 개혁적인 사림파士林派의 중앙 정계 진출이 이루어지는 시기와 맞물려 《조선왕조실록》등 관찬 연대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교의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던 사림 정치 전개 과정에서 모범적인 관료상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청백리는 ‘청렴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청백리는 청렴결백하여 부패하지 않은 관리를 말하는데, 조선시대 공직자에게 부여하는 가장 명예로운 칭호였다. 공무 능력뿐만 아니라 본인은 물론, 주변까지 청렴하고 깨끗한 생활을 한 관리들이었다.
오늘날 청백리를 인식할 때 흔히 도덕과 청렴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실제 민생 현장에서 뛰어난 행정 능력과 공정한 재판 등 전문 관료로서의 실무 능력을 중시하였다.
실학자 성호 이익의 청백리 제도 개선책과 다산 정약용의《목민심서》는 수령 등 관료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과 함께 실무 능력을 강조하였다. 백성의 삶을 책임지는 리더쉽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경기도 대표 청백리가 재조명되고 이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기를 기대한다. 이는 오늘날 ‘김영란 법’의 사례에서 보듯 공직윤리가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는 시점에서 더욱 필요하다. 동시에 경기 각처에 분포한 청렴 유적을 현양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관료들이 머리에 썼던 관모, 매미의 5덕을 상징
– 문文 청淸 렴廉 검儉 신信
조선시대 임금이 쓰던 익선관과 관료들의 관모 뒤에는 매미의 날개를 본뜬 장식이 있다. 매미의 5가지 덕목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매미의 다섯가지 덕목
머리 위 갓끈 있으니 학문이 있고 頭上有緌則其文也
천지 이슬 마시니 맑음이 있고 含氣飮露則其淸也
곡식 먹지 않으니 염치가 있고 黍稷不享則其廉也
거처할 집 짓지 않으니 검소하고 處不巢居則其儉也
오고 갈 때를 지키니 신의가 있다 應候守常則其信也
육운陸雲의 <한선부寒蟬賦> 중에서
조선 태조 원년(1392)부터 대한제국기 광무10년(1906)까지의 관원을 선별하여 그들의 성명·자·생년·급제년·나이·도임년·전관·본관 등을 기록한 인명사전이다. 현존하는 선생안(先生案, 각 관아에서 관원의 인적사항을 적은 책) 가운데 가장 방대한 양이다. 권6 <청백淸白>조에 186명의 청백리 명단이 실려 있다.
선조 대에 청백리에 녹선된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시문집. 권2 「연보年譜」에 1601년(선조 34) 백인걸과 함께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등을 청백리로 선록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수령들이 탐욕을 부리는 것은 조정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면 정치도 따라서 바르게 되어 관리들의 탐욕이 자연히 없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청강공 이제신이 지인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은 첩, 선조 11년(1578) 진주목사 시절에 토호들의 농간으로 병부를 도난당하자 지인들이 위로한 글이다. 이제신은 분실된 병부가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벼슬길에 물러났다. 선조 14년 다시 기용되어 강계 부사가 되고, 함경도 병마 절도사가 되었다.
인조 대에 청백리로 녹선된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 1572~1630)의 시문집. 이명준은 청강공 이제신의 넷째 아들로 충청감사, 충청관찰사로 지낼 때 선정으로 명망이 높았다. 부친인 이제신에 이어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 책은 1749년에 편집 간행된 것이다. 1630년(인조 8)에 시정책인 「진시폐소(陳時弊疏)」를 올려 당시 정치의 폐단을 비판하고 올바른 정치를 위하여 임금이 몸소 왕도의 실천에 앞장설 것을 건의한 내용 등이 담겨있다.
분류 | 주제 및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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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경기, 청렴의 고장 |
섹션1 | 청렴의 아이콘, 청백리 |
섹션2 | 인물, 경기 청백리 |
섹션3 | 목민관, 지방을 다스리다 |
섹션4 | 탐관오리와 암행어사 |
섹션5 | 새로운 청백리를 말하다 |
섹션6 | 청백리 정신의 계승 |
프롤로그 : 경기, 청렴의 고장
청백리는 조선시대 공직자에게 부여하는 가장 명예로운 칭호로 공무 능력뿐만 아니라 본인은 물론, 주변까지 청렴하고 깨끗한 생활을 한 관리들이 선정되었다.
경기도는 명실상부 청백리의 고장이다. 조선 500년간 국가에서 선정한 청백리는 218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날 경기도에 생가·묘소를 비롯하여 그 유적이 남아있는 인물은 60여명에 이른다. 황희, 이이, 이원익 등 이미 잘 알려진 인물 외에도 미처 알려지지 않은 청백리들의 유적은 경기 도처에 남아 있다.
‘청백리’는 글자 그대로 청렴결백하여 부패하지 않은 관리를 말한다. 흔히 청백리 정신으로 청렴만을 생각하는데, 백성들을 삶을 풍족하게 할 행정과 사법의 능력도 중요한 덕목이었다.
청백리는 사후에 선정된 분들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생전에는‘염근리廉謹吏’라고 불리웠다. 16세기이후 사림파士林派가 중앙 정계를 장악하자, 명절名節을 중시하는 당시 분위기하에서 관료로 뛰어난 행적을 남긴 인물을 청백리나 염근리로 선발하여 관료의 모범으로 삼았다.
청백리 제도는 관리에게 염廉과 치恥를 일깨우고 탐관오리를 경계하는 정화 기능이 있었다.
세종대의 황희와 맹사성, 성종대의 허종은 재상을 역임했지만, 일생동안 초라한 집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며 청백리의 표상으로 칭송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청백리에 선발된 이제신·이명준부자를 비롯하여 평생 청빈하게 살아 인조로부터 집과 궤장几杖을 하사받은 이원익, 다산 정약용이 명재상으로 꼽은 채제공도 모두 경기도가 자랑하는 청백리들이다.
목민관은 흔히 ‘사또’라고 불리는 지방의 수령이다. 수령은 지방에서 국왕의 통치를 대행하는 관리였다. 수령으로 부임하는 인물들은 임금 앞에서 목민관이 수행해야하는 실천 항목으로 ‘수령 7사’를 맹세했다.
그러나 현실은 직무를 태만히 하거나 부정하게 재물을 착취하는 탐관오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방 수령 가운데 탐관오리를 적발하는데 애를 쓴 국왕은 정조였다. 정조는 각 도의 관찰사가 수령을 평가하는 이른바 ‘포폄제도’를 강화했다. 포는 공무를 잘 본 경우로 영전이나 승진시키고, 폄은 태만한 경우로 좌천이나 파직을 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암행어사를 적극 활용하여 수령의 잘못과 백성의 고통을 살피도록 했다. ‘암행어사’ 라고 하면 보통 『춘향전』의 이도령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악을 징치하는 이몽룡의 활약상이 바로 암행어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다. 암행어사로 이름난 박문수도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국왕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가 혼란해지면서 관리들의 기강은 해이해지고 탐관오리가 만연화되었다. 때문에 영조와 정조대에는 불과 11명에 그칠 정도로 청백리에 선발된 이가 적었다.
지방사회의 혼란을 개혁하고자, 성호 이익은 청백리 제도의 개선안을 제시했고, 다산 정약용은 수령의 개인 수양과 덕목 및 행정지침을 담은 『목민심서』를 편찬했다.
오늘날 청백리 제도는 공직자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해 윤리성과 도덕성이 뛰어난 공직자를 포상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1981년 4월 20일 최초로 「국가공무원법」에 ‘청백리상’을 규정하였다. 청백리는 충성과 청렴, 정직 및 봉사를 실천하여 공직자의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을 선정하였다.